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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아침을 열며]실종된 증세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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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주긴 쉬워도 올리긴 어려운 게 세금이다. 얼마 전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를 검토한다 했다가 여론의 반발 조짐이 보이자 곧바로 없던 일이 돼 버린 적이 있다. 당초 이 제도는 근로소득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업주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1999년 한시적으로 도입됐다. 카드 사용이 보편화돼 목적이 달성되면 제도를 환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증세로 인식돼 버렸다. 어느 정부도 근로소득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제도를 중단할 만한 ‘배짱’이 없었고, 촛불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8차례나 일몰(제도 종료)이 연장돼 온 이 제도는 결국 9번째 시한 연장을 앞두고 있다.

경향신문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사실 부자들이 만들어낸다. ‘부자 아빠’에게 세금 걷는 정부는 로빈 후드 같은 도둑이다. 부자 아빠는 로빈 후드가 ‘낭만적 영웅’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부자 아빠가 로빈 후드 이야기를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여전히 로빈 후드의 추종자들이 남아 있다며 세금 얘기를 꺼낸다. 골자는 정부가 내라는 대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부자가 된다는 거다. 그래서 부자들은 세금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똑똑한 변호사와 회계사를 고용하거나 정치가들을 설득해 법을 바꾼다. 부자 아빠는 변호사와 회계사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 그 편이 정부에 돈을 주는 것보다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1997년 출간돼 재테크 분야의 고전 반열에 오른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오는 부자 아빠의 말씀이다.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수천만권(한국에서만도 수백만권) 팔렸다고 하니 이 부자 아빠의 교훈을 따라 해 부자가 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미국의 부자들 모임이라는 ‘애국적 백만장자 그룹(Patriotic Millionaires)’은 지난 2월 뉴욕 주지사와 주의회에 연간 500만달러 이상 소득을 올리는 부자들의 세금을 인상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JP모건 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도 지난 4월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부자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뿐이 아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큰손인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 많은 미국의 갑부들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부자들 스스로가 현재 무섭게 진행되고 있는 부의 양극화가 초래할 암울한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세금은 정부의 조세수입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의 거래를 줄여 경제적 순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세금은 필요하다. 요즘은 국방이나 치안, 인프라 건설 등 전통적인 쓰임새보다 부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목적이 중요해졌다. 정부가 로빈 후드가 돼야 한다는 거다.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는 한국에서 이 같은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민간에서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안될 때는 정부라도 나서야 한다. 여기에는 세금이 들 수밖에 없다. ‘혈세’로 일자리 만든다고 폄훼하려만 드는 부자 아빠 같은 이들도 있지만, 이런 데 쓰라고 걷는 것이 혈세 아닌가.

문재인 정부도 세금 앞에선 작아지고 있다.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는 ‘저성장과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재정 확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을 뒷받침할 조세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전이 제시되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처음 열린 2017년 국가재정전략회의 때만 해도 보편증세까지는 아니지만 부자증세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후 정부의 조세개혁은 종합부동산세의 찔끔 인상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러다 지난해 같은 회의에서는 증세 문제가 논의에서 완전히 제외됐고, 박능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만 “세수 확보 문제의 본격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을 뿐이다. 올해 회의에서는 이 외마디 외침조차 사라진 것 같다. 보편증세는커녕 부자증세마저 실종됐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선진국보다 낮고, 그러다 보니 정부의 재정이 부족하고, 복지와 사회안전망은 열악하다. 정부가 주창하는 ‘혁신적 포용국가’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세수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도 증세는 금기어가 되고 있다. 부자 아빠들의 요구에 밀려 가업상속공제제도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등의 얘기들만 나온다.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세금 조금씩 더 내서 사회를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어보자고 설득하는 정부를 만나고 싶은 건 과한 욕심일까.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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