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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만파식적]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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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구슬 연못을 마시고 있네. 은평상에서 잠자다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미소로 요희를 부르며 푸른 적삼을 벗기네.’ 조선 시대의 천재 여류 문인 허난설헌이 여덟 살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한 대목이다. 상량문은 집을 짓기 위해 대들보를 올리며 행하는 상량식에서 상량을 축복하는 글이다. 허난설헌은 신선 세계 궁궐 ‘광한전 백옥루’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며 이 글을 썼다. 상량식에 많은 신선이 참석했지만 상량문을 지을 빼어난 시인이 없어 자신이 상량문을 올렸다는 의미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지었다고 믿기 힘든 문장 솜씨는 그녀를 조선 팔도에 한시 신동으로 소문나게 만들었다.

허난설헌은 1563년 조선 중기 문신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허엽은 딸에게 ‘초희’라는 이름과 함께 ‘난설헌’이라는 호를 지어줬고 그녀에게 오빠·남동생과 똑같이 교육의 기회를 줬다. 당대 뛰어난 문장가로 소문난 허성과 허봉이 허난설헌의 오빠다.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그녀의 남동생이다.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알아본 아버지 허엽과 둘째 오빠 허봉은 명성이 자자했던 당대 시인 이달에게 그녀의 문장 공부를 부탁했다고 한다.

빼어난 천재 문장가로 자란 그녀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열다섯 살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하지만 번번이 과거에 떨어진 남편과 고루한 시어머니 사이에서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다. 19세 때에 딸을, 20세 때 아들마저 병으로 잃었다. 뱃속의 아이도 유산하고 그를 아끼던 오빠 허봉이 객사하는 아픔을 겪은 끝에 27세에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유언으로 자신의 글들을 모두 태우라 했지만 동생 허균은 그녀의 200여편의 글을 묶어 ‘난설헌집’으로 남겼다. 명성이 자자했던 그녀의 글은 명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져 인기를 끌었다.

경기 광주시가 초월읍 허난설헌 묘에서 시작해 5㎞가량 이어지는 역사문화체험길을 이달 착공해 9월 완공할 계획이다. 천재 문인이었던 허난설헌은 조선 시대 인습의 족쇄에 갇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그녀의 글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에 그녀의 1,000여편의 다른 시들은 사라졌다고 하니 아쉬움이 크다. 400여년 늦게 태어났다면 그녀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홍병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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