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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4당5락? 잠자는 동안 뇌는 낮에 공부한 내용 복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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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형주·정수근의 기억 실험실

②잠과 기억

깊은잠인 비렘수면, 학습한 정보 재생

렘수면이 선택한 정보 장기기억으로

학습된 정보를 보호하는 것 넘어

학습 과정 자체를 수행할 가능성도

보통 사람은 하루 7~8시간 필요해

특히 처음 4시간 잘 자야 잘 기억

뇌 발달 완성 안 된 유아·청소년은

잠 부족하면 뇌성장 불균형 가능성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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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일하는 자세를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잠은 그저 인생의 낭비이자 죽음에서 잠시 빌려온 시간일 뿐이다. 나 역시 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아버지께서 책상 위에 놓아둔 ‘4시간 수면법’이라는 책이 내 하루 일과 중 희생해야 할 시간을 일찌감치 정해주었다. 그 책에 따르면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하루 3시간 수면을 취하면서 유럽을 정복했으며, 에디슨은 4시간만 자면서 연구에 몰두하여 인류를 빛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4시간 수면이라는 성공 비법은 “아직 삶의 효율성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아버지 같기도 하고, 영원히 잡히지 않는 짝사랑 같기도 하다.

수면과 기억의 관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체적 한계가 있는데 잠을 적게 못 잔다는 이유만으로 의지박약으로 몰리기에는 살짝 억울하다. 어쩌면 4시간 수면법은 생물학적 한계를 영리하게 극복한 것일 수도 있다. 에디슨과 나폴레옹이 수시로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수면의 절대적인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사당오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유행어)의 꿈은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던가? 수험생에게 4시간 수면법을 연습하라고 충고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기엔 수면과 기억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실험심리학의 선구자이자 기억의 망각 연구를 처음 연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스스로 특정 단어를 학습한 뒤 얼마나 빨리 잊는지를 측정했다. 여러 조건을 시험해본 결과 흥미롭게도 학습 직후 잠에 들면 단어를 덜 잊는다는 사실을 1885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 후 1914년 독일의 심리학자 로자 하이네는 잠이 들기 직전 학습하는 것이 낮에 학습하는 것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는 실험 결과를 보고했다. 이후 20세기 초반에 걸쳐 현재까지 수면이 기억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는 꾸준히 발표되었고, 부족한 수면이 인지기능 및 기억 저하를 일으킨다는 연구도 많았다.

2017년 미국 위스콘신대 키아라 치렐리 박사 연구팀은 잠을 오래 못 자면 교세포라 불리는 뇌의 특정 세포가 신경세포들 간의 연접 부위인 ‘시냅스’를 더 많이 먹어치워 비정상적인 신경회로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면 부족이 치매 등 뇌질환과 관련이 높다는 다른 연구 결과도 함께 고려할 때, 불충분한 수면이 뇌의 기억 기능에 좋은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수면이 왜 기억에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우선 수면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수면 상태에 접어들면 각성 상태와 달리 뇌에서 서로 다른 파형의 활성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이는 크게 ‘비렘(NREM)수면’이라 불리는 깊은 수면, 그리고 ‘렘(REM)수면’이라 불리는 얕은 수면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비렘수면과 렘수면이 반복되는 것을 ‘수면 주기’라 부르며, 이것이 고르게 반복된 뒤에 깨어나면 ‘잘 잤다’고 느끼게 된다.(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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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잠에 들면 얕은 수면에서 깊은 수면으로 빠르게 진입한다. 깊은 수면 단계에서는 호흡이 느려지고 근육 활동은 거의 사라지며, 뇌파가 매우 느린 파형을 보이게 되므로 이를 ‘서파수면’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뇌파가 점차 각성 상태와 비슷하게 활발해지지만 근육은 정지 상태에 머무르는데, 이때가 렘수면 상태이다. 수면 초기에는 깊은 수면(비렘수면 또는 서파수면)의 비율이 높고, 후기로 갈수록 얕은 수면(렘수면)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런 수면 주기는 기억에 어떤 영향을 줄까? 초기 학자들은 수면이 단지 학습한 정보를 다른 정보에 방해받지 않게 보호함으로써 그 기억이 잘 유지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애리조나대학의 브루스 맥노턴 연구팀은 살아 있는 쥐를 대상으로 각성 상태와 수면 동안에 기억과 관련이 깊은 뇌 부위인 해마의 활성을 비교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잠자는 동안 해마 신경세포들의 활성 패턴이 깨어 있는 동안 해마 신경세포들이 공간탐색 작업을 수행할 때 활성화됐던 패턴과 거의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수면이 학습된 정보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 학습 과정 자체를 수행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서파수면이 대부분인 초기의 깊은 수면 상태에서 이 패턴이 관찰된다.

학습이 기억으로 전환되려면

그렇다면 깨어 있는 시간에 학습한 정보는 잠을 자는 동안 어떻게 기억으로 전환될까? 현재까지 알려진 학습과 기억의 생물학적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학습한 정보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맞닿아 있는 ‘시냅스’라는 구조를 통해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되고, 결국에 이렇게 연결망을 구성하는 특정 신경회로에 저장된다. 다시 말해 기억은 뇌의 특정 장소나 세포 내에 ‘흔적’처럼 남겨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신경세포들의 연결 구조인 시냅스의 연결성이 강화되는 과정이 기억 형성에 필수이며, 며칠에서 몇 년 넘게 지속되는 장기기억은 ‘장기 시냅스 강화 과정’에 의해 조절된다. 따라서 특정 정보가 오래 기억되려면 특정 시냅스의 장기 강화 과정을 통해 해당 정보를 담고 있는 신경세포들의 활성이 다른 신경세포 활성보다 더욱 높아야 한다.

낮에 무엇인가를 충분히 학습하면 해당 신경회로가 강화되면서 그 정보가 빠르게 장기기억으로 전환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많다.

우선 기억이 뇌에 흔적을 남기려면 시냅스 강화에 꼭 필요한 특정 단백질의 발현 변화가 필수적인데 이 과정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또한 특정 정보가 기억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다른 정보가 새로 학습되고 입력되면서 여러 신경회로망을 자극하게 된다. 그러면 처음 학습한 정보에 대한 선택적 시냅스 강화가 힘들어진다.

그런데 잠에 들면 처음 만나는 깊은 수면, 즉 서파수면 동안에 흥미로운 일이 발생한다. 2018년 영국의 올레 파울센 연구팀은 실험동물이 잠에 들어 서파수면에 빠졌을 때, 인위적으로 학습 정보에 해당하는 자극을 가해 기억이 형성되는 것처럼 장기 시냅스 강화가 유도되는지 관찰했다. 그랬더니, 서파수면 동안에 나타나는 느린 파형의 뇌파가 불필요한 정보에 대응하는 신경 활성도는 낮추고 학습한 정보에 대응하는 신경 활성도는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끄러운 시내에서 대화를 하다가 소음이 차단된 녹음실에 들어가 다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뇌는 서파수면 동안 조용해진 틈을 타 낮에 학습한 정보들을 재생한다는 것이다. 마치 낮에 배웠던 것을 복습하기 위해 스스로 되뇌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재생되는 정보는 희미할지 모르나 주변의 방해가 없어 매우 뚜렷할 것이다.

얕은 잠 단계에서도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얕은 잠인 렘수면을 지나는 동안 뇌파는 각성된 상태와 비슷하며 뇌의 혈류량과 산소 소모량이 증가한다. 또한 장기기억 형성에 중요한 단백질도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이때 서파수면 동안 재생되면서 살아남은 정보들이 주로 장기기억 저장 대상이 되며, 이 기억에 해당하는 신경활성이 학습자의 이전 경험과 맞물려 재편집되기도 한다. 의사들은 렘수면 동안 뇌에서 벌어지는 활동이 마치 정신증의 증상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혹 꾸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꿈의 전개와 표상들이 정신증의 망상, 환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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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자도 되는 사람, 인구 5%

다시 4시간 수면법으로 돌아와 보자. 아무리 잠깐씩 휴식을 취하고 낮잠을 잔다고 해도 4시간만 자는 것이 정상적인 인지기능에 문제가 없을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기존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보통 성인이 잠에 들면 깊은 수면으로 빠르게 진입하고 초기 약 4시간 동안 90분 주기로 렘수면과 비렘수면을 반복한다. 그 뒤 비렘수면은 점차 사라지는 반면에 렘수면의 비율은 점차 높아져, 잠에서 깨기 직전에는 렘수면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수면이 기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단계가 깊은 수면임을 고려하면, 처음 4시간 정도 잘 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짧은 수면 시간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5%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들은 아마도 초기 4시간의 수면 동안 수면 주기를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생체 메커니즘을 타고난 게 아닌가 싶다. 덤으로 쪽잠과 멍 때리기 등의 습관을 통해 수면 동안 부족했던 학습 정보 정리 과정을 보충했을 수도 있다.

짧은 낮잠도 기억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고, 최소 6분만 졸아도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있다. 이런 짧은 잠은 대개 깊은 수면, 즉 서파수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폴레옹과 에디슨은 낮잠을 자면서 이러한 서파수면 동안 뇌에서 ‘필요한 정보만 남기는 정보의 선별화’를 최적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능력을 타고난 소수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들은 적어도 하루 7~8시간은 잠을 자야 정상적인 인지 기능이 작동한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의 성공 사례와 비교하며 낙담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창 뇌가 성장하고 있는 유아·청소년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수면 주기 동안 신경세포 및 시냅스 활성의 변화와 맞물려 뇌에서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과 같은 감정, 충동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급격하게 변한다. 특히 유아청소년기는 뇌 속 화학물질들의 변화 양상이 성인과 다르다. 청소년의 수면 시간이 성인과 달리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에 맞춰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뇌 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유아·청소년이 잠을 충분하게 자지 못하면 학습 효율도 나쁠 뿐 아니라, 뇌의 성장도 불균형해질 가능성이 높다.

잠은 사투를 벌이며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 불필요한 대상이 아니다. 낮 동안 접한 정보를 필요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간이며, 그렇게 저장되고 새로이 편집한 기억으로 내일을 충만하게 만드는 삶의 필수 요소이다. 비록 ‘죽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빌려온다 하더라도, 깨어 있는 시간을 더 치열하게 산다면, 충분한 ‘죽음’이 활기찬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책임연구원(신경생물학)



박형주·정수근의 기억 실험실: 기억은 뇌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기억은 어떻게 저장되고 쇠락하고 변형될까? 인류가 기억에 관해 호기심을 가진 것은 오래됐지만, 기억의 실체가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한 건 최근 뇌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다. 정부 산하 뇌 분야 전문 연구기관인 한국뇌연구원의 박형주·정수근 선임연구원이 뇌과학이 밝혀낸 기억의 비밀을 번갈아 들려준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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