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7 (수)

[ESC] 빙하가 할퀸 자리, 산은 피오르를 품고 있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커버스토리/북유럽

'말 타는' 기분으로 '야생' 네뢰위 피오르 달리다가

설산과 금빛 피오르, 파란 빛 머금은 빙하 지나

극사실주의 화가도 놀랄 '피오르의 보석' 예이랑에르

암벽에 매달려서야 노르웨이 피오르의 힘 느끼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는 바다인가, 넓은 계곡인가, 긴 호수인가. 배를 타고 피오르를 지나가면, 산과 폭포 천지이다. 지평선? 그런 건 없다. 바닷물로 가득 차 있지만, 성난 파도가 힘을 잃고 내뱉는 흰 포말 같은 이미지는 이곳에 없다. 피오르는 수만 년 이상 긴 세월 동안 거대한 빙하가 산을 천천히 긁고 내려와 만든 U자형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찬 지형이다. 엄연히 좁고 긴 만(협만)이다. 노르웨이는 '피오르의 나라'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북부에 길게 뻗은 이 나라는 피오르 약 1200개가 해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지난달 25일 오후 4시30분, 노르웨이 서남부 도시 베르겐에서 송네 피오르로 가는 배에 올랐다. 피오르 여행은 시작부터 종잡을 수 없었다. 출발한 다음 2시간 동안 해는 두 차례나 얼굴을 감췄다 드러냈다.

한겨레

고속보트 선내는 따뜻하고 조용했다. 정원 190명 규모 보트엔 시베리아허스키 한 마리가 반려인과 동승했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개는 복도 바닥에 배를 깔고 잠들었다. 2층 갑판에 올라가자 세찬 바람에 실비가 흩날렸다. 이날 평균 기온은 10도. 갑판에선 점퍼를 입어도 한기가 느껴졌다. 한 청년은 배가 달리는 내내 갑판 처마 아래서 뱃바람을 쐤다. 그의 옆엔 스릴러 소설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배는 1시간30분 걸려 '피오르의 왕'이라 불리는 송네 피오르에 진입했다. 길이 200여㎞, 최대 수심 1300m인 송네 피오르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오르다. 그곳에서 멀리 보이는 눈 쌓인 산 정상은 흰머리수리 머리처럼 빛났고, 가까운 언덕엔 겨울을 견뎌 낸 뾰족한 빨간 지붕들이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언덕 키 작은 나무들은 연두색 새순을 내밀었다. 희고 빨갛고 푸른, 낯선 색감 때문이었을까.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송노피오라네주 발레스트란 마을까지 3시간55분, 배를 타는 내내 기이한 풍경에 정신이 몽롱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8시30분, 노르웨이 현지 가이드 토르(49)를 따라 선착장으로 갔다. 노르웨이 남자 이름 토르(Tor)는 북유럽 신화에서 힘이 가장 센 '토르'(Thor) 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키 195㎝ 토르는 방수복과 고글을 나눠준 뒤, 12인승 고속 고무보트(RIB)로 안내했다. 목적지는 네뢰위 피오르. 그 이름('좁다'는 뜻)에 걸맞게 노르웨이에서 가장 좁고, 가장 야생적인 피오르로 꼽힌다. 토르가 점점 배의 속력을 올렸다. 최고 시속 92.6㎞(50노트). 보트는 제 스스로 만든 물결에 들썩였다. 그건 마치 물 위에서 말을 타는 기분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발로 바닥을 디디니 엉덩방아를 피할 수 있었다. '말타기'가 한창 흥겨울 때, 고글이 바람에 뒤로 날아갔다. 잠시 이마 위로 헐겁게 올려 쓴 탓이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뜰 만큼 세찬 바람에 머리칼이 요동쳐 이마를 쉴 새 없이 때렸다. 따갑고 가려웠다. 고맙게도 토르는 속력을 줄여 폭포 바로 아래로 배를 몰았다. 수백미터 아래로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올려다보니, 밑에선 보이지 않는 폭포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그 사이 거대한 분무기 같은 폭포수는 얼굴에 '네뢰위 피오르산 미스트'를 흠뻑 뿌려주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속보트 탑승 1시간40분 만에, 네뢰위 피오르 끝에 도달했다. 그곳엔 '바이킹 마을'이 있었다. 8~11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바다 건너 유럽과 러시아를 침략한 노르만족, 바이킹의 문화를 체험하는 곳이다. 여행객들은 쇠도끼를 던져 통나무에 꽂았고, 멧돼지, 순록 모형에 화살을 쐈다. 바이킹이 침략한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온 마리 캉디토는 바이킹 전통 의상을 입고 여행객들을 안내했다. 그는 “10여년 전 노르웨이에 여행 왔다가 바이킹 문화에 매료돼 이곳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피오르는 물 위에서만큼이나 산 위에서 볼 때 아름답다. 발레스트란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30분 달려 도착한 곳은 로엔 마을. 이곳엔 피오르에서 해발 1011m 호벤산을 5분 만에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 '로엔스카이 리프트'가 있다. 2017년 5월20일 개장 당시 노르웨이 왕비 소니아 하랄센이 참석할 만큼, 그 가파른 경사와 광활한 경치가 주목받았다. 저녁 7시, 해가 떨어지려면 족히 두 시간은 남았다. 그 시각 호벤산 정상에서 바라 본 노르 피오르는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금빛으로 물들었다. 피오르를 품은 산들은 유독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유럽 대륙 최대 빙하(487㎢) 지대인 요스테달 빙하 국립공원에서 이어진 산줄기들이었다. 설산과 금빛 피오르가 어우러진 풍경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산을 내려와 베아테 비크 헤우게 노르 피오르 관광청 매니저에게 물었다. “당신은 피오르와 빙하 중 무엇을 더 좋아하나요?” 10초 정도 망설인 그가 입을 뗐다. “빙하는 피오르를 만들었기에 정말 중요한 곳이죠.” 우문현답이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8시 요스테달 빙하 지류인 브릭스달 빙하로 갔다. 로엔 마을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20여㎞ 달렸다. 길은 8월 즈음 연어 떼가 거슬러 올라온다는 올덴 호수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계곡은 아직 겨울이었다. 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던 폭포가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브릭스달 안내사무소 앞에 주차하면 다시 굽이굽이 산길이다. 그 길을 버기카(험한 길을 달릴 수 있게 만든 작은 차)로 15분, 걸어서 15분 더 가야 한다. 산과 나무에 가려진 브릭스달 빙하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발 1200m 아래로 산과 산 사이 계곡이 통째로 얼어붙어 있는 브릭스달 빙하는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빙하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흰 하늘 아래 브릭스달 빙하의 파란빛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날이 흐려 다행이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브릭스달 빙하에서 내려와 '피오르의 보석'이라 불리는 예이랑에르 피오르로 향했다. 차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20분, 헬레쉰트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0여㎞ 거리 예이랑에르 마을까지가 예이랑에르 피오르다. 마을엔 두 개의 전망대가 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피오르와 마을 경관이 펼쳐지는 플뤼달 협곡 바위 전망대와, 외르네스빙엔 전망대다. 지난달 28일 낮 12시, 2인승 전기차를 타고 외르네스빙엔 전망대로 향했다. 마을 중심가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지만 머리핀처럼 급격히 휘어진 꼬부랑길을 11차례 꺾어 들어가야 했다. 꼬부랑길 가장 높은 지대가 독수리 서식지였단 이유로 '독수리 길'(eagle bend)이라고도 불린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극사실주의 화가가 이곳에서 예이랑에르 피오르를 본다면, 좌절할지 모른다. 흰 설산을 휘감아 흐르는 감청색 피오르, 얇은 붓으로 흰 물감을 내리그은 듯 쏟아지는 폭포, 그리고 야들야들한 대구 껍질처럼 햇빛에 반짝이는 피오르의 물비늘은 '실사'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웅변하는 듯했다. 여기선 노르웨이 피오르의 봄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겨우내 얼어붙은 눈이 녹아 폭포수를 만들어 피오르를 채우는 봄이 오면, 노르웨이의 해는 4월 말에도 밤 9시가 훌쩍 넘어서까지 모든 걸 녹여버릴 기세로 점점 길어져 폭포는 더욱 거세진다. 피오르는 봄이 올수록 푸름이 짙어지는 산 그림자 덕분에 더욱 더 푸르게 변해간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오베 쉴스타(59) 예이랑에르 피오르 관광청 총책임자에게 물었다. “매일 피오르를 보는 노르웨이 사람들한테도 피오르가 아름다운가요?” 그가 답했다. “그럼요! 하늘빛, 물빛, 산빛이 날씨와 계절 따라 달라요. 그때그때 모두 아름답지요.”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예이랑에르의 평온한 풍경을 뒤로하고, 차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2시간30분을 달렸다. 도착한 곳은 뫼레오그롬스달주 온달스네스 마을. 오후 4시30분, 마을 중심가 선착장에선 10대로 보이는 아이들 6명이 다이빙하며 놀고 있었다. 롬스달 피오르 건너편 흰 눈 쌓인 산등성이는 멀게만 보였다. 한창 다이빙 묘기를 구경하고 있을 때, 페라타(ferrata) 가이드 에르빈 바렌츠(43)를 만났다. 페라타는 철심을 잡거나 밟고 암벽을 오르는 운동이자 놀이다. 에르빈과 차로 30분 거리 산 중턱에 있는 등반 코스로 향했다. 이날 오를 코스는 수직거리 200m, 페라타 입문과정 코스였다. 안전모와 안전끈을 착용하고 주의사항을 숙지한 뒤, 암벽을 올랐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철심을 밟고 매달리길 반복하다 힘이 부칠 무렵, 산 아래 피오르와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며 한숨 돌렸다. 90도 각도의 절벽에선 '제 몸뚱어리 하나 지탱 못 하는' 현실을 다시금 절감하며, 산의 악력에 견줘 내 악력은 얼마나 미약한가 생각했다. 낑낑대며 암벽에 매달려 중도 포기하고 싶어질 땐 피오르의 압도적인 자연사를 상상했다. 옛날 옛적 거대한 빙하가 오랜 세월에 걸쳐 단단한 산들을 할퀴며 내려왔는데, 후빙기 들어 그 골짜기에 바닷물이 가득 찼고, 길고 깊은 피오르가 탄생했다. 빙하에 긁히고 빙하의 힘을 견뎌내며 피오르를 만들어낸 산 위에서, 난 최소한 내 몸이라도 버텨내 보려고 끝까지 안간힘을 썼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베르겐·송노피오라네주·뫼레오그롬스달주(노르웨이)/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노르웨이 피오르 여행 수첩

항공 평소 인천공항에서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으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핀란드 헬싱키나 터키 이스탄불 등을 경유해야 한다. 한진관광은 오는 6월14일~8월9일 매주 금요일 총 9차례 인천~오슬로 직항 전세기를 운영한다. 오슬로에서 베르겐까지는 보통 국내선 비행기나 열차로 이동한다.

물가 한국에 견줘 꽤 높다. 맥도널드 빅맥 세트가 세금포함 약 119NOK(노르웨이 크로네)으로 약 1만6000원. 길거리 생맥주(한자 비어) 330㎖ 한 잔은 89NOK(약 1만2000원).

음식 대구 필레나, 토마토소스에 대구를 넣어 끓인 노르웨이식 바깔라우가 대표적이다. 바이킹 음식 문화에서 유래한 호텔 뷔페는 여느 나라 뷔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간혹 음식이 매우 짠 식당이 있으니 미리 '소금 적게'를 주문하자.

숙소 피오르마다 유서 깊은 고급 호텔들이 있다. 송네 피오르 발레스트란 마을에 있는 크비크네스(Kviknes) 호텔, 노르 피오르 로엔 마을에 있는 알렉산드라 호텔, 예이랑에르 마을에 있는 유니온 호텔 등.

누리집 피오르 코스별 선박·열차 이용권 '피오르 인 어 넛셀'(fjordtours.com), 호벤산 정상에서 피오르 전망을 볼 수 있는 '로엔 스카이 리프트'(loenskylift.no), 네뢰위 피오르 위를 달리는 '고속 고무보트'(balestrandadventure.no), 온달스네스 마을 암벽을 등반하는 '페라타'(tindesenteret.no), 베르겐 여행(visitbergen.com)은 각 영문 누리집 참고.

문의 노르웨이관광청 서울사무소(02-777-5943).

한겨레



노르웨이 유럽 북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를 북유럽 5개국이라 부른다. 그중 스칸디나비아반도 서북부에 길게 뻗은 나라가 노르웨이다.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의 약 3.8배(38만5178㎢)지만, 인구는 약 540만명으로 경상도 인구보다 적다. 2018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약 8 달러. 1960년대 원유와 천연가스 발견 이후 국가 경제가 커졌다. 노르웨이는 여행자들에겐 ‘피오르의 나라‘다. 빙하 침식으로 생긴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찬 지형인 피오르가 약 1200개 있다.

한겨레

베르겐·송노피오라네주·뫼레오그롬스달주(노르웨이)/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 [▶영상 그 이상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