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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현장]‘나는 K팝 팬? 비판자?’ 여성들의 ‘길티 플레저’ 파티···‘슬픔의 케이팝 파티’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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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열린 슬픔의 케이팝 파티 현장. 슬픔의 케이팝 파티 제공


“지금부터 갈 때까지 가볼까~ 오, 오, 오 오빤 쓰레기!”

지난 11일 밤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슬픔의 케이팝 파티(슬케파)’에 참석한 500여명의 관객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디제이 테이블 앞에 선 DJ GCM이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걸그룹 포켓걸스의 ‘쓸애기’를 믹싱한 곡 ‘OPPA SUREGI’를 틀자마자 ‘떼창’이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NCT, EXO, 몬스타엑스, 샤이니, 세븐틴, 방탄소년단…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아이돌 그룹의 공식 응원봉들이 ‘오빤 쓰레기’의 박자에 맞춰 흥겹게 흔들렸다. 관객 대부분은 K팝과 아이돌 그룹의 팬을 자처하는 20~30대 여성 팬들이었다. 물론 아이돌 가수의 출연은 예정에 없었다.

저마다 다른 아이돌 ‘오빠’의 팬인 이들이 ‘오빤 쓰레기’를 뜨겁게 열창하던 그 순간, 이 파티 이름에 붙은 ‘슬픔’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이 이끄는 세계적 위상의 음악 장르인 동시에, 승리·정준영 사태로 대표되는 반인권·성차별적 문제가 뒤섞인 분야인 K팝. 그리고 이 양면적인 K팝 시장에서 ‘팬덤’이라는 문화를 형성하며 적극적으로 소비자 역할을 해온 여성들의 복잡한 마음이 일순 터져나온 듯했다. 이 파티를 주최한 회사원이자 칼럼니스트인 복길(30·계정명)은 “슬케파는 팬덤 문화에 기반한 K팝의 문제적 지점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럼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죄책감을 느끼면서 즐기는 행동)’ 감성을 공유하고 있는 파티”라고 했다. 슬케파의 주인공은 K팝 아이돌이 아니라, K팝과 함께 웃고 울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온 여성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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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열린 슬픔의 케이팝 파티 현장. 슬픔의 케이팝 파티 제공


이번 슬케파는 디제이 파티에 앞서 ‘다이어리’ 콘셉트의 토크이벤트를 열어 K팝 향유 주체로서의 여성의 삶을 비췄다. K팝 산업의 주된 소비자인 여성들은 그간 남성 생산자들이 만든 음악과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빠순이’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K팝의 청취자로서 여성 개개인의 사적 경험과 기록을 보면, 이들의 삶이 ‘빠순이’라는 멸칭으로 축약될 만큼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한 비정규직 여성이 자신의 K팝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하며 “정규직이 자리를 떠난 사무실에서 홀로 부르던 노래”로 가수 청하의 곡을 꼽거나, 또 다른 여성이 ‘쵸재깅(싸이월드의 오타)’이라는 이름의 플레이리스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곡 ‘응급실’을 소개할 때 관객이 ‘공감의 탄성’으로 호응하는 식이다. K팝 역사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두 곡을 틀고 관객에게 ‘더 선호하는 음악’을 고르게 하는 게임도 진행됐다. 관객들은 보아의 ‘넘버 원’과 이효리의 ‘텐미닛’ 사이에서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만의 K팝 취향과 청취사를 재정립한다. 관객 박가현씨(21)는 “팬덤 위주로 분자화 돼있던 아이돌 팬들이 K팝이라는 장르를 중심으로 한 데 뭉쳐, 아이돌 아닌 ‘나’를 위해 놀 수 있는 파티라는 점이 좋았다”면서 “K팝을 즐기는 ‘나’에 집중하다 보니 이 산업의 중심에 여성이 주체로 설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을 폭력과 착취의 대상으로 내모는 K팝의 산업 구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슬케파의 기획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K팝에서 ‘여성의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슬케파 토크쇼를 진행한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여기 관객분들은 (K팝 때문에) 매일 웃다, 울다, 망했다고 자책하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K팝을 주체적으로 즐기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여러분들이 계속 피드백을 줄 때 이 산업이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최자 복길 역시 “여성 소비자 내부에서 계속 ‘나는 왜 K팝을 좋아하는가’ 질문을 던지다보면, 산업의 여성 착취적인 구조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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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열린 슬픔의 케이팝 파티 현장. 슬픔의 케이팝 파티 제공


이처럼 슬케파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K팝 파티다. 물론 K팝을 향유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매번 20% 가량의 남성 관객들이 참석하긴 하지만 여성 위주로 돌아가는 파티 기획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관객 양모씨(20)는 슬케파의 장점을 ‘안전함’이라고 꼽기도 했다. “K팝을 즐길 수 있는 클럽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클럽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부담이 있어 가지 못했다”면서 “슬케파는 페미니즘 이슈에 민감한 트위터 계정 운영자가 주최하는 여성 중심의 파티다 보니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믿음에 부응해 슬케파는 선곡에서 성폭력 의혹에 연루된 가수의 곡을 일절 배제했다. 파티에서 빅뱅, SS501 등의 곡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다.

이러한 의미를 다 떠나서 K팝의 매력을 살린 ‘흥겨운 파티’이기도 하다. 중독적이고 강렬한 멜로디·비트와 통속과 전위를 오가는 재밌는 가사들로 채워진 K팝 음악들을 각기 개성이 확고한 DJ들의 믹스 버전으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f(x)의 ‘피노키오’에서 천상지희의 ‘나 좀 봐줘’,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로 이어지는 선곡 등을 듣고 있자면 좀체 가누기 어려운 흥겨움이 찾아온다. 나르샤의 ‘삐리빠빠’ 같은 ‘숨어서 듣는 명곡’을 500여명의 관객이 함께 열창하는 대장관이 펼쳐지고, 흘러나오는 SES의 ‘아임 유어 걸’에 저절로 안무를 따라추는 본능의 무서움도 실감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직도 K팝을 놓지 못한’ 이들의 슬프고 즐거운 이 독특한 파티는 오는 8월 부산 개최를 앞두고 있다. 도쿄 개최 역시 추진 중이다. 주최자 DJ GCM은 “K팝을 둘러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다 빼고, 그냥 음악이 좋다는 것을 직접 느끼는 공연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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