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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상급 시민·하급 시민'…'계급 사회' 논란 중인 日 [이동준의 일본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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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에서 ‘상급 시민’이란 말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현지 한 칼럼니스트는 “과거와 달리 열심히 일해도 신분 상승이 어렵게 되자 서민들의 체념과 절망이 상급 시민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세계일보

‘상급 시민은 체포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프린트 티셔츠가 쇼핑몰 등에서 판매될 정도다. 일본 쇼핑몰 캡처


◆언론 보도가 발단

일본 언론은 보통 사건 사고 뉴스를 보도할 때 가해자들의 얼굴을 공개하며 ‘가해자·용의자XX’라고 실명을 밝힌다.

그러나 지난날 19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 A씨에겐 그렇게 표기하지 않고 상대 높여 부르거나 존중하는 의미로 쓰는 ‘상(さん)’을 사용했다.

A씨는 10명을 다치게 하고 2명을 숨지게 했지만 구속되지 않았다. 반면 이틀 후 일본 고베시에서 2명 사망 등 4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 버스 운전기사 B씨에 대해 언론은 평소처럼 ‘용의자 B씨’라고 소개했고, B씨는 구속됐다.

B씨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힌 운전자 A씨는 구속도 되지 않고 언론에서도 표현을 신경쓴 데 대해 일본 여론은 A씨를 ‘상급 시민’이라고 지칭하며 ‘하급 시민(버스 기사)에게만 죄를 물었다’고 분노했다.

이후 지난 골든위크(4월27일~5월6일·황금연휴) 기간 휴가나 여행을 다룬 일부 언론 보도가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으로 비치면서 ‘계급사회’ 논란이 확산됐다.

당시 일부 언론은 10일간 연휴를 모두 사용하는 전체 국민의 30%에 초점을 맞췄다. 한 언론사는 평생 가보기도 힘든 아프리카 여행과 관련한 기사를 내보내며 ‘아프리카 여행 시 참고하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연휴 기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하는 서민들의 화를 키운 꼴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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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뉴스 캡처


◆그들만의 계급 사회

시민들의 불만은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드러난다. 최근 뉴스포스트에 따르면 SNS에는 서민들의 분노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상급 시민과 하급 시민이라는 말이 확산했다.

한 누리꾼은 “공무원과 언론에 근무하는 상급 시민들은 연휴와 무관하게 일하는 서민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라며 “상급 사회를 위한 기사는 넘쳐났지만 수입이 줄어 고통받는 일용직과 비정규직의 분노는 지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누리꾼도 “일하는 노인이 점점 늘어나는데 ‘여행 지출을 늘린다’는 상급 시민들 뉴스와 방송이 주를 이뤘다”며 “언론의 조명은 상급 사회를 향한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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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시민도 평등하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인터뷰. 방송화면 캡처


칼럼니스트 오바타 카즈유키는 “일본에서 ‘상급 시민과 하급 시민밖에 없다’와 같은 생각이 확산 중”이라며 “언론 보도도 시민들에게 ‘신분제도가 있다’는 인상(느낌)을 안겨줬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상급 시민이란 말이 2015년쯤부터 사용돼 ‘신조어 사전’에 올랐다. 신조어 사전에는 ‘상급 시민은 일반 시민과 반대되는 일본 국민의 신분을 나타내는 개념 중 하나’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당시 도쿄 올림픽 엠블럼이 도용됐다는 의혹을 해명하는 자리에서 심사위원장이 “전문가들은 도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반 시민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발언에서 비롯됐다.

오바타 카즈유키는 “일반 시민이라는 표현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며 비판하는 뜻으로 상급 시민이란 말이 인터넷에 퍼지고, 최근 유행도 그러한 맥락”이라며 “상급 시민이란 말에 서민의 체념과 절망이 묻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보상이 따라오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는 인식이 대중에 확산했다”며 “상급 시민은 처음부터 배경이 좋았던 사람이나 태어날 때부터 천재성을 가진 우수한 사람이 속한다.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변한 계급 사회에서 시민들 분노는 점점 쌓여만 갔다”고 덧붙였다. 오바타 카즈유키는 “어느덧 상급 시민은 평범한 서민에겐 손이 닿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라며 “상급 시민을 다른 말로 하면 상류층과 특권계급이다.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확산하는 지금 상급 시민이라는 말은 더 견고해질 수밖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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