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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거품도 꺼졌는데, 정시에 퇴근하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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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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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제작회사에서 웹 디렉터로 일하는 히가시야마 유이(요시타카 유리코)는 사내에서 오후 6시만 되면 퇴근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업무 특성상 야근이 잦은 회사에서 거의 매일 정시에 퇴근하고 매년 연차까지 다 쓰는 히가시야마가 남들 눈에 곱게 보일 리는 만무하다. 정시 퇴근을 위해 업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도, “자기 일만 끝내면 되는 거냐”며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불성실한 이미지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히가시야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6시까지 업무를 마치고 회사를 나와, 6시10분까지 온 손님들에게는 술 반값만 받는 가게에 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 들이켜는 게 유이의 낙이다.

가장 유혹적인 제목의 드라마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티비에스(TBS)의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는 현재 일본에서 제일 시의성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달 1일부터 ‘일하는 방식 개혁 관련법’이 단계별 시행에 들어가 그 효과에 대해 이목이 쏠리고 있다. 우리나라만큼이나 장시간 노동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외 노동의 상한 규제를 새롭게 도입한 법이다. 산업재해로서의 과로사 인정 기준과 같다는 비판이나 오히려 장시간 노동을 일상화할 수 있다는 부작용 우려도 제기되지만, 과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일본의 과로사 문제에는 불합리한 근로 조건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는 말하자면 ‘과로가 미덕’이라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드라마다. 실제로 주인공 히가시야마가 근무하는 넷 히어로즈의 사장은 ‘일하는 방식 개혁법’의 홍보대사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회사를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해 회사가 있는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야근 없는 회사를 목표로 한다고 알린다. 히가시야마가 이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정시 퇴근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인물도 바로 사장이었다.

그럼에도 히가시야마의 정시 퇴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실무를 담당하는 임원들의 인식이 여전히 옛날 사고에 가로막혀 있어서다. 히기시야마 부서에 새로 부임한 부장은 그녀가 다른 동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며 비난하고, 그녀와 달리 ‘일을 따내려면 남들보다 10배는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료 직원을 더 높이 평가한다. 퇴근 뒤 맥주 한잔 기울이는 그녀를 보고 “우리가 네 나이 때는 죽을 각오로 일하래서 죽을 각오로 일했지. 정시 퇴근은 꿈도 못 꿨다”고 한마디씩 던지는 중년 남성들도 있다. 그런 윗세대 남성들에게 “그리고 거품이 꺼졌죠”라고 일침을 날리는 히가시야마의 당당한 모습이 이 드라마 최대의 관전 포인트다. 보다 보면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10개월째를 맞은 우리나라의 근로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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