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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정은 러시아서 또 빈손 귀환…北 '최고존엄 모시기'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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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푸틴 만남으로 외교 보폭 넓혔지만

의전 홀대 당하고 건강문제도 노출

한·러 관계 고려 못한 ‘예견된 참사’

귀환 열차 속 김정은 절치부심 뭘까

블라디보스토크서 ‘빈손 귀환’한 김정은
중앙일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에 위치한 극동연방대학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만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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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외교 반경이 다소 넓혀지는 분위기다. 새해 벽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북·중 정상회담을 치른 것을 시작으로 북·미, 북·러 정상회담을 잇달아 개최하면서 대외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는 못한 국면이다. ‘비핵화’ 의지 표명만으로 환대받던 지난해와 달리 이젠 구체적 행동 조치를 미국과 국제사회가 요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고위급 담판이라 할 정상외교가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김정은의 대외 리더십은 시험대에 올랐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도외시한 회담 전략과 헙수룩한 의전은 블라디보스토크 회담장에서도 드러났다. 자칫 집권 8년 차를 맞는 동안 공들여온 최고지도자 위상 다지기에 상처를 입는 상황까지 점쳐진다.

북한 체제에서 김정은이 차지하는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당의 유일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다. 조선노동당 고위 간부부터 일반 주민까지 ‘10대 원칙’이라 부르며 신봉해야 하는 11쪽짜리 문건을 말한다. 여기에는 북한이 소위 ‘두 분의 수령’이라 칭하는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지가 소상하게 담겨있다. 김정은 집권 이듬해인 2013년 수정 보완된 행동규율이자 지침서인 셈이다. 문건에는 김일성·김정일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김정은’은 없다. 하지만 죽은 두 사람보다 살아있는 권력인 김정은 위원장을 절대시하려는 ‘10대 원칙’이란 걸 모르는 북한 주민은 없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제3항의 “김일성·김정일의 권위, 당의 권위를 절대화하며 결사옹위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김일성·김정일과 노동당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절대로 융화묵과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하여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이며, 온갖 계급적 원쑤(‘원수’의 북한식 표현)들의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수령님과 장군님의 권위, 당의 권위를 백방으로 옹호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2013년 12월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도 결국 뿌리를 캐보면 10대 원칙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보위부 특별재판이란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김정은이 참석한 행사에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등의 괘씸죄로 사형판결을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짚어보면, 지난달 말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일정은 곳곳에서 10대 원칙으로부터의 탈선을 드러냈다. 이례적으로 북한 출발 이전부터 북·러 정상회담의 개최 소식을 관영매체로 주민들에게 알리고 평양역에서 성대한 환송행사도 했지만 러시아 도착부터 난항이었다. 전용열차가 처음 다다른 핫산역 간이 경사로는 목재를 엉성하게 짜놓은 형태로, 제대로 페인트칠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선 미리 대기하던 북측 경호인력들이 열차 손잡이를 소독하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정차 지점이 어긋나 애를 먹었다. 꼼꼼한 준비가 부족했고 북·러 간 의전 협력도 엉성했다는 얘기다. 환영행사는 역 앞을 지나는 왕복 4차선 도로 위에서 단출하게 진행돼 ‘길바닥 의전’이란 말이 나왔다. 아스팔트를 부분적으로 다시 깔거나 차선도색을 새로 하는 등의 최소한의 ‘국가 원수’ 맞이 준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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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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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 악몽은 정상회담 당일인 4월 25일에도 이어졌다. 회담장인 극동연방대학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김정은 위원장의 인민복 상의 옷자락은 허리춤에 끼인 채 구겨져 있었지만 누구도 챙기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란 점에서 국제사회와 언론의 이목이 쏠려있는 결정적 장면에서 스타일을 구긴 것이다. 푸틴에게 선물로 장식용 칼을 건넨 뒤 러시아 풍습에 따라 답례로 받은 동전을 김 위원장이 제대로 챙기지 못해 떨어트릴 뻔한 상황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푸틴과의 단독회담에선 양 엄지손가락을 서로 비비며 초초해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해 시진핑 주석과 첫 대면 때를 떠올리게 했다. 김정은이 감추고 싶어했을 건강상의 문제점이 노출되는 일도 벌어졌다. 열차에서 내려 몇 걸음 이동한 김 위원장에게 국영TV ‘로시아’가 들이댄 카메라에는 가쁘게 몰아쉬는 김정은의 거친 숨소리가 그대로 담겨버렸다.

문제는 의전에만 그치지 않았다. 열차로 1180㎞(평양~블라디보스토크)를 달려온 김정은을 맞는 푸틴의 딱딱한 표정은 북한이 강조한 북·러 간 전통 우호관계와는 거리가 느껴졌다. 북측이 확대회담에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만을 배석시켜 북핵과 한반도 정세 등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러시아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외에 유리 트루트네프 대통령 극동전권대표(부총리 겸임), 예브게니 디트리흐 교통장관, 알렉산드르 코즐로프 극동개발장관, 올렉 코줴마코 연해주지사가 자리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의 대북압박을 거론해 자신이 지난 2월 하노이에서 겪은 수모와 관련한 하소연을 했지만 푸틴의 관심은 달랐다. 북한을 관통해 한국으로 가는 러시아가스관이나 남·북·러 철도협력에 방점을 둔 푸틴은 급기야 기자회견에서 “비핵화와 관련해서는 미국과 입장이 같다”는 말까지 던졌다. 김정은에겐 청천벽력이다.

이런 분위기를 예견한 듯 북한 외무성 라인의 얼굴빛은 어두웠다. 회담 전 푸틴 대통령과 줄지어 인사를 나눈 북한의 고위 간부 가운데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 두 사람만은 고개 한 번 까딱 않고 꼿꼿한 자세로 악수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김정은-푸틴 간 정상회담과 관련한 의제나 경호·의전 조율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나타났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러시아 측에 10만톤의 밀가루 대북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푸틴 대통령은 절반인 5만톤만 보냈다는 게 북한 매체의 보도다.

일각에선 북·러 정상회담 과정에서 나타난 의전 실책 등의 문제가 ‘김여정의 공백’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으로부터 세심한 보살핌을 받던 김 위원장이 상당한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그렇지만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결렬 책임을 지고 김영철 당 부위원장과 함께 문책성 조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만큼 조기복귀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위 탈북인사는 “김정은의 대외적 권위를 충성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강한 압박과 사상검토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며 “김여정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러 정상회담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두고 ‘예견된 참사’란 평가도 나온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출구로 김정은이 푸틴을 만났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란 지적이다. 러시아는 북한 못지않게 내년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러 관계를 중시한다. 2014년 3월 크림반도 침공사태 이후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어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무엇보다 미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에서 알 수 있듯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사이의 모종의 커넥션도 북한이 간과해선 안 될 대목이다.

서동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사는 ‘북·러 정상회담 평가와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김정은 방러가 8년 만에 이뤄진 북·러 관계의 현주소를 반영한다면, 한·러 정상 간 교류는 보다 잦고 돈독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201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만난 것을 비롯해 4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곧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답방하는 일정이 양국 간 논의 중이란 설명이다.

방러 일정을 마치고 사실상 빈손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김정은은 절치부심했을 공산이 크다.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뒤 60여 시간 열차 귀환 길에서 겪었던 트라우마의 재판이다. 이런 좌절을 통해 그가 어떤 마음의 행로를 정하게 될지는 점치기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핵무기를 거머쥔 채로 그가 북한체제의 ‘최고존엄’으로 오랫동안 자리하기엔 도전적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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