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이슈 [연재] 중앙일보 '김식의 야구노트'

[김식의 야구노트] 신바람 야구 LG, 홈 관중 3000만 명 처음 넘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내 프로스포츠 첫 기록 화제

치어리더·선수응원가 처음 도입

24년째 우승 없어도 팬심 여전해

누적 관중 2, 3위는 롯데·두산

중앙일보

LG 트윈스의 이벤트에 참가한 어린이들. LG 어린이팬 상당수가 1990년대 원년 팬의 자녀다. [사진 LG 트윈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92년 4월 30일. LG 트윈스는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홈경기에서 1-7로 완패했다. 시즌 초부터 최하위(당시 8위)로 떨어졌던 LG는 5연패를 당했다. 이날 밤 LG 선수단은 광주 해태 전을 위해 버스를 타야 했다. 잠실구장 밖에는 성난 LG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LG 구단 버스는 팬들을 피해 잠실구장 앞이 아닌 근처 탄천 주차장에 주차했다. 선수들에게 ‘각자도생’ 해서 버스에 탑승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선수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잡아!” 여기저기서 분노한 LG 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시 신인 투수이었던 차명석(LG 단장)은 두 선배와 이동하다가 어느 팬에게 들켰다.

“죽여!”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차 단장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두 선배는 각자 쏜살같이 달아난 뒤였다. 그는 “어느 순간 나 혼자 남아 있더라. ‘이 팀이 이래서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중앙일보

전광판 속의 ‘엘린이’라는 용어는 ‘엘지+어린이’의 합성어다. [사진 LG 트윈스]


열성 또는 극성으로 유명한 LG의 팬덤은 한국의 스포츠 관전 문화를 상징한다. LG는 지난 21일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누적 홈 관중 30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잠실 LG의 홈 경기 관중을 집계한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팀을 응원한 관중도 있다. 반대로 LG의 원정경기 팬도 그 이상 있다. 잠실구장을 함께 홈으로 쓰는 두산의 누적 관중보다 500만 명 정도 많다.

LG는 1994년 이후 24년 동안 챔피언에 오르지 못했지만,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스포츠단이다. 인기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인구가 많은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이점과 ‘신바람 야구’ 이미지다.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할 때 형성된 자산이 그만큼 값졌다.

프로야구 출범 멤버였던 MBC는 89년 10월 구단 매각을 결정했다. MBC의 내부 소식을 가장 빠르게 입수한 그룹이 LG(당시 럭키금성)였다. 당시 서울 입성을 노렸던 지방 연고 팀도 있었던 터라 LG의 MBC 인수는 은밀하게 진행됐다.

중앙일보

어린이 팬들과 손을 마주치는 LG 강타자 박용택. [사진 LG 트윈스]


당시 인수전을 기억하는 LG그룹의 한 관계자는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님이 곧바로 인수위원회를 꾸려 한 달 만에 우선협상자 지위를 얻었다. 90년 1월 인수계약식까지 모든 과정이 속전속결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구본무 전 회장은 트윈스의 초대 구단주를 맡았다.

매각이 결정되자 청룡 직원들은 2명을 제외하고 모두 MBC로 돌아갔다. LG그룹은 야구단으로 전입할 직원들을 사내 공모했다. LG 트윈스라는 이름도 사내 공모로 결정했다. LG 선수단은 작업복 같은 유니폼을 입고 대만 전지훈련을 떠났다. 3월 창단식에는 뉴욕 양키스의 핀스트라이프(줄무늬)에서 착안한 세련된 유니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치어리더와 막대풍선 응원, 선수 응원가를 최초로 도입한 구단이 LG다.

중앙일보

차명석 LG 단장이 창단 직후인 1990년 2월 대만 전지훈련 때 입었던 ‘럭키금성’ 유니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식 기자]


LG는 창단 첫 시즌인 1990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4전 전승을 거두며 우승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온종일 LG의 이름이 나오자 럭키금성은 아예 그룹명과 이미지를 LG로 바꿨다. 이후 LG는 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챔피언(4전 전승)의 자리에 올랐다. 창단 후 5년 동안 두 차례나 우승하면서 ‘신바람 야구’라는 LG의 브랜드가 생겼다. LG가 최고 인기팀으로서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다.

매일 수백 통의 팬레터가 LG 구단사무실에 도착했다. 차명석 단장은 “그중 50%는 유지현·서용빈·김재현 등 신인 3총사에 온 것이었다. 김용수·정삼흠·김동수 선배 등에게도 편지가 많이 왔다. 정말 대단한 인기였다”고 회고했다. “차 단장은 팬레터를 얼마나 받았느냐”고 묻자 그는 “내 편지는 집으로 배달된다고 우겼다”며 껄껄 웃었다.

중앙일보

프로야구 1000만 관중 구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LG 야구는 창단 이후 5년 만에 두 차례나 우승했다. 그러나 응축된 열기가 때론 분노의 에너지로 바뀌기도 했다. 90년대에는 팬들이 무기력한 선수들을 질타했고, 2000년대에는 연패에 빠진 감독에게 청문회까지 요구했다. LG 팬들은 꼴찌를 해도 매년 마지막 홈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떠난 그라운드를 향해 목이 터지라 응원가를 부른다.

차 단장은 “팬들을 생각하면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다. 팬들이 원하는 건 좋은 성적”이라며 “매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냥 믿어달라고 하지 않겠다. 팬들 앞에서 공약하고, 실력으로 그 약속을 지키는 과정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