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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하루 185명에게만 허락된 '천상의 안식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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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의 유산⑥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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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 정상부의 남봉(3922m). 뾰족한 암봉이 정상부 어귀에 버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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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마다 우러르는 산이 있다. 만물의 시원이자 태초의 말씀으로 받들어지는 산은 우뚝한 모습만으로도 세상을 거느린다. 거친 봉우리에는 거역하기 힘든 정기가 서리고, 깊은 숲 꽃 한 포기에도 먼 소문 같은 전설이 얹힌다. 까마득한 높이처럼 까마득한 신화를 품은 산에 드는 일은, 하여 여느 산행과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걸음은 조신해야 하며, 정신은 반듯해야 한다.

말레이시아의 키나발루(Kinabalu)산. 산 아래 적도 사람들이 “산의 조상”이라며 떠받드는 영산(靈山)이다. 꼬박 이틀을 걸어서 해발 4000m 위 고원에 올랐다. 뾰족한 봉우리들 사이에서 구름 아래 세상을 굽어봤다. 인간은 왜 이리 작은가. 이 미약한 존재들은 왜 이리 악에 받쳐 있는가. ‘산 이전의 산’에서 내려다본 우리네 사는 꼴은 초라했다. 산에서 내려와 담배를 끊었다.

영혼의 봉우리 vs 식물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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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에서 맞은 일출. 새 세상이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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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은 적도가 관통하는 보르네오(Borneo)섬 동북쪽에 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 보르네오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 나라가 들어앉은 섬이다. 섬 아래쪽은 인도네시아가, 위쪽은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가 나눠 갖는다. 키나발루산은 말레이시아 사바(Sabah)주에 속한다. 사바주의 주도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휴양지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다.

키나발루 산자락의 원주민이 카다잔두순(Kadazandusun)족이다. 이 고산족의 언어로 ‘아키나발루(Aki-Nabalu)’가 ‘산의 조상’이란 뜻이다. 카다잔두순족은 키나발루산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모인다고 믿는다. 요즘도 12월마다 날짜를 정해 ‘모놀롭(Monolob)’이라는 전통 의례를 치른다. 흰 닭 7마리를 산에 바치는데, 행사 기간에는 탐방객의 산행이 금지된다. 카다잔두순족에는 산에서 사냥할 때 말을 삼가야 한다는 금기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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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의 일몰. 넘어가는 해가 키나발루 동쪽봉우리 끝에 살짝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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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의 일몰, 해발 3272m 라반라타 산장에서 촬영했다. 구름이 발아래서 강물처럼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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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0일. 서양 젊은이 10명이 키나발루산 정상에서 옷을 모두 벗어 던지는 난동을 부렸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그들 중 4명을 체포해 벌금형을 내렸다. 그로부터 6일 뒤인 6월 5일. 키나발루산에 진도 5.9의 지진이 발생해 18명이 숨졌다. 1964년 탐방로를 개방한 이후 발생한 최초의 강진이자 대형 인명사고였다. 예기치 못한 재난이 일어나자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산의 영령이 벌을 내렸다고 수군거렸다. 그해 6월 11일 영국 BBC의 보도 내용이다. 지금도 카다잔두순족은 4년 전의 지진이 산이 내린 경고이자 저주라고 믿는다.

키나발루산의 가치는 적도 원주민의 성지에 그치지 않는다. 온 인류가 지켜야 할 생태계 보고가 되레 마땅하다. 키나발루 국립공원의 면적은 753.7㎢다. 서울(605.21㎢)은 물론이고 싱가포르(719㎢)보다도 크다. 이 공원 안에 지구 식물의 2.5%가 산다. 식물 종류만 6000개가 넘는다. 키나발루 산자락은 지구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식물이 사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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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큰 꽃 라플레시아. 이 희귀종도 키나발루 산자락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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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은 적도 바로 위에 돋은 봉우리다. 산 아랫자락은 열대 기후, 해발 3800m 이상은 고산 기후에 속한다. 산이 품은 숲에서 모두 6개 기후의 식생이 발견된다. 이 산자락에 유난히 많은 식물이 사는 까닭이다. 사바주 국립공원 운영위원회 마크랄린 라킴 부회장은 “키나발루산은 전 세계 식물의 낙원”이라고 강조했다. 키나발루 국립공원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새로 열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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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 라반라타 산장 오르는 길. 해발 3000가 조금 넘는 지점이다. 막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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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몰려온 구름이 키나발루산 정상부 봉우리들을 덮고 있는 모습.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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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 국립공원을 체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산 아래 식물원을 돌아봐도 좋고, 숲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좋다. 적도 부근의 노천 온천이 기억에 남는다. 열대우림에서 수온 65도의 유황온천을 즐기는 장면은 낯설고 신기했다. 키나발루산은 4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성됐다.

키나발루산 정상 산행은 모험가의 로망이다. 악마라도 살 것 같은 기괴한 꼴의 봉우리들이 일상에 찌든 중년의 가슴도 뛰게 한다. 정상의 감동을 기대하고 전 세계에서 탐방객이 날아드는 까닭이다.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지난해 코타키나발루를 방문한 한국인은 약 33만7000명이었지만, 키나발루산을 오른 한국인은 1539명이었다. 한국은 지난해 코타키나발루 외래 방문객 1위를 차지했으나 한국인 방문객의 0.4%만 키나발루산을 올랐다. 한국 여행사의 패키지상품이 키나발루산 트레킹을 꺼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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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은 암벽 등반을 해야 하는 구간도 길다. 해발 3800m 이상 구간 대부분이 암벽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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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보르네오섬의 열대우림. 산 위는 고산 기후에 속하고, 산 아래는 열대 기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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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하게 생긴 산은 오르는 길도 험한 법이다. 키나발루산도 그러하다. 초보자는 엄두도 내지 않는 게 맞다. 꼬박 이틀간 산행이 이어지는데 첫날은 약 9시간, 이튿날은 약 14시간 걸어야 한다. 산행 거리는 왕복 17.44㎞로 길지 않으나, 산행시간은 긴 편이다.

무엇보다 고도 차이가 크다. 산행기점 팀폰(Thimphon) 게이트가 해발 1866m, 정상 로우스피크(Row’s Peak)가 해발 4095m에 있다. 이틀 안에 비고 2229m를 극복해야 한다. 참고로 남한 최고봉 한라산의 해발고도가 1947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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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산행을 함께한 베테랑 산악 가이드 알림 비운(62). 50년 가까이 키나발루산을 올랐다고 했다. 키나발루산에 오르려면 산악 가이드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키나발루 산자락 출신인 카다잔두순족만 산악 가이드와 포터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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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 모질다. 해발 3272m 라반라타(Laban Rata) 산장에서 정상부까지 약 2.5㎞ 구간이 특히 고약하다. 가파른 계단이 한없이 이어지고, 밧줄에 매달려 바위도 타야 한다. 여기에 고산증이 더해진다. 체력과 더불어 고산 경험도 요구된다. 산악 가이드 알림 비운(62)이 “릴렉스! 릴렉스!”하며 북돋았지만, 여유 같은 건 상상도 못 했다.

키나발루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는, 정상에 서면 알 수 있다. 산행은 새벽에 시작된다.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새벽 1시 기상해 해드 랜턴 쓰고 꾸역꾸역 오르다 보면 동쪽 하늘이 어스름이 밝아온다. 이윽고 화강암 깔린 정상부 고원에 올라서면,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봉우리들 사이로 누런 해가 나타난다. 바로 이 찰나, 바로 여기에서 새 세상이 열린다. 거친 숨 몰아쉬다 문득, 무언가라도 결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잠깐 신을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코타키나발루(말레이시아)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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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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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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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키나발루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동남아의 휴양지다. 인천공항에서 하루 8편 코타키나발루 직항이 뜬다. 키나발루산 트레킹은 경쟁이 치열하다. 하루 정원이 정해져 있다. 3월까지 1일 135명이었는데, 4월부터 185명으로 늘었다. 그래도 3개월 전에는 신청을 해야 한다. 트레킹은 2박3일 여정이 무난하다. 트레킹 전날 공원 숙소에서 묵고, 트레킹 중에는 라반라타 산장에서 묵는다. 가격은 1인 2000링깃(약 55만원) 정도. 산악 가이드 비용 포함, 포터 비용 불포함. 산 아래는 열대 기후지만, 이른 아침 정상부는 영하 3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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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한·아세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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