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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흔들리는 ‘평창의 봄’…무엇이 문제일까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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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합의 이행 않고 대남 비난 공세 / 북한의 잘못된 전략이 ‘평창의 봄’ 흔들어

세계일보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해 4월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에 조성된 평화 분위기와 북한 비핵화 협상이 흔들리고 있다. 북한과 미국, 남한과 북한 사이에 진행됐던 대화가 주춤하면서 갈등이 표면화하는 양상이다.

지난해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분위기가 충만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세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해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상호 적대행위 중지와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 등의 내용을 담은 9.19 남북 군사합의서를 통해 남북 군 당국은 북방한계선(NLL)과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김 위원장과 만나 북미 관계 개선 및 비핵화 등을 담은 센토사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지난 2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미, 남북 관계는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은 재개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남북이 합의한 교류협력 사안들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으며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구성 등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도 ‘올스톱’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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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지난해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북한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北, 합의 이행 않고 대남 비난 공세

북한은 지난해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등을 통해 채택된 남북 합의를 비교적 충실히 이행해왔다. 군사 분야의 경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와 비무장지대(DMZ) 내 일반전초(GP) 시범철수, 강원 철원군 DMZ 내 화살머리고지 일대 지뢰제거와 도로 연결 등도 이뤄졌다.

하지만 올해 들어 북한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관련 준비를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왔으나, 회담이 결렬된 이후에도 북한은 우리측이 제안한 장성급 회담 등에 호응하지 않고 있다. 남북간 군비통제 문제를 다룰 군사공동위 구성과 서해 평화수역 및 공동어로구역 설정 등 남북 군사합의에 명시된 사안들은 논의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달부터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남북 공동유해발굴은 우리측 단독으로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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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 소재 극동연방대학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대신 북한은 선전매체와 대남기구를 동원해 비난공세를 펴며 우리측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25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한미 군 당국이 22일부터 진행중인 연합공중훈련을 비난하며 “남조선 당국이 미국과 함께 우리를 반대하는 군사적 도발 책동을 노골화하는 이상 그에 상응한 우리 군대의 대응도 불가피하게 될 수 있다”면서 “우리가 그 어떤 대응조치를 취하든 남조선당국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그에 대해 시비질할 때는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사태가 험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평통의 비난 공세는 김 위원장이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져야 한다”며 비난한 직후 나온 것으로, 선전매체에서 진행됐던 비난과는 차원이 다른 대목이다.

◆북한의 잘못된 전략이 ‘평창의 봄’ 흔들어

북한이 우리측과의 대화나 합의 이행에 나서지 않은 채 대남 비난 공세에 나선 것은 “대화 국면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경고를 통해 우리측을 압박,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비롯한 남북 경제협력과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 조치 등을 끌어내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북한 비핵화 방식의 차이로 결렬되면서 제재 완화가 불투명해지자 화살을 우리측에 돌렸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우리측의 일방적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북한의 전략적 오판이라는 평가다. 북한은 비핵화 방식으로 단계적, 동시적 해결방안을 내세운다. 단계적, 동시적 해결방안이 실효를 거두려면 서로가 주고받는 ‘카드’의 가치가 동등해야 하며, 양측간에 신뢰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조건으로 대북 제재 중 핵심적 사안에 대한 해제를 요구했다. 신용이 없는 소비자가 통신사 대리점에 가서 “나중에 대금을 지불할테니 스마트폰을 지금 내게 달라”면 대리점 직원이 응하겠는가. 회담 결렬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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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 소재 극동연방대학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 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문재인정부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방안을 거론해왔다. ‘굿 이너프 딜’ ‘조기 수확’ 등 다양한 개념이 등장한 것도 이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예비역 장성들과 보수 진영의 반발에도 남북 군사합의서를 채택해 상호 적대행위 중단구역을 설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것도 한반도 군사적 긴장완화를 통해 북한의 안보불안을 덜어 비핵화를 촉진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북한은 문재인정부가 올해 들어 북미 대화 동력 확보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동분서주하는 동안 한미 연합군사훈련이나 우리 군의 단독훈련을 “군사합의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비핵화 로드맵은 제시하지 않았고, 비핵화 협상과 무관한 남북 관계 개선, 교류협력 증진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문재인정부가 운신할 폭을 좁혀놓고 비난만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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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상 적대행위 금지구역(완충수역)에 관한 9·19 남북군사합의가 시행된 첫날인 지난해 11월 1일 오후 인천 옹진군 연평도 인근 해안에서 기동훈련중인 고속정의 포신에 덮개가 씌워져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정부에 남북 관계 개선과 북한 비핵화 진전을 위해 미국과 남한 내 보수 진영을 설득할 ‘카드’를 주지 않은 채 압박만 가하면, 북한은 체제 보장도 경제적 이익도 얻을 수 없다. 남한 내 대북 반감을 키워 남북 대화 동력을 약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뿐이다. 북한의 전략적 오판이 남북 관계 파급력 축소로 이어지는 이유다.

자신들에게 편리한 대로 행동하는 북한의 태도도 문제다. 지난해 북미 대화 분위기가 고조됐을 때,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자 북한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일시 철수했으며, 남북 군사합의의 본격적인 이행을 위한 군사 회담도 외면하고 있다. “외부세력의 간섭과 개입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고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열어나가야 한다”며 우리측을 비난했던 북한은 25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러시아가 미국에 우리 입장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나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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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사자 남북 유해공동발굴을 위해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 내 화살머리고지 일대에 개통된 전술도로를 북한군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국방부 제공


오는 27일은 판문점선언이 채택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과 대화 분위기를 조성한 끝에 판문점선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대북 제재에 묶여있는 판문점선언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려면 북한의 태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새로운 제안을 하기 힘들다면 한미 양국이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명분’이라도 줘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25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협상 교착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발언은 국면 전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핵화 협상이 난항을 겪는다면 남한과의 합의를 이행, 신뢰를 증진해 북미 대화 재개 동력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다. 특히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과 직결된 군사 분야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된다면,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입증하는데 도움이 된다. 철도 및 도로, 산림 협력 등 다른 분야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북한이 전략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판문점선언과 남북 군사합의서는 빛을 잃게 된다. 비핵화 협상 동력도 얻을 수 없다. 북한이 남북 군사 회담과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의 공동유해발굴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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