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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인터뷰] 김용대 “처음 골키퍼 하라고 했을 때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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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 460경기 뛴 전설 김용대, 4월 20일 울산에서 은퇴식 치렀다

-김용대 “영입 제안한 팀 있었지만 고민 끝 축구화 벗기로 결정”

-소심했던 소년 “처음 골키퍼 하라고 했을 때 펑펑 울었다”

-전설의 조언 “난 지금도 공이 두려워. 지름길 찾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라”

-“제2의 인생 이제 시작. 많은 분이 응원 보내줬으면”

엠스플뉴스

한국 축구 전설 김용대 골키퍼(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잠실]

누군가는 김용대를 ‘비운의 선수’라고 한다. 이운재, 김병지 등 한국 축구 대표팀의 전설적인 이와 경쟁하면서 2인자에 머문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대는 “그마저도 감사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보고 배울 기회였던 까닭이다.

김용대는 2002년 프로에 데뷔해 K리그 통산 460경기를 소화했다. 1983년 시작된 K리그 역사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출전 기록을 자랑한다. 1998년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 등과 함께 19세 이하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현 AFC U-19 챔피언십)를 제패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거쳐 A 대표팀에서도 21경기를 뛴 전설이기도 하다.

김용대는 4월 20일 은퇴식을 치렀다.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울산 현대에서 정든 그라운드와의 작별을 고한 것. 하지만, 아쉬움은 크지 않다. 오히려 김용대는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낼 수 있어 감사하고, 제2의 인생 시작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이 크다”며 활짝 웃는다.

엠스플뉴스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김용대를 만났다. 지금부터 이운재, 김병지 못잖은 또 하나의 레전드, 김용대의 축구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김용대 “영입 제안한 팀 있었지만 고민 끝 축구화 벗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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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울산에서 은퇴식을 진행한 김용대(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17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감했다. 올 시즌 전 다른 팀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고 알고 있는데.

2월까지 고민했다. 선수 생활을 더 이어갈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지. 동계훈련이 시작되는 1월에 다른 팀에서 연락이 왔다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2월에야 연락이 왔고, 당시엔 마음 정리를 한 상태였다. 유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이곳저곳 알아보니 또래 친구들이 유소년 감독, 코치를 많이 하더라. 그래서 고민 끝에 축구화를 벗기로 결심했다.

유소년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는 건가.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다. 송종국 형이 감독으로 있는 ‘SL FC’란 유소년 축구 클럽에 주말마다 나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골키퍼는 특수 포지션이다 보니 코치 수요가 많은지 알아봤다. 골키퍼는 팀마다 딱 1명뿐인 선수이고 기본기가 아주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잘 배워야 한다. 나 같은 경우는 고교 3학년 때 처음 전문적인 골키퍼 코치한테 배울 수 있었다.

당시엔 골키퍼 코치가 흔치 않았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전엔 그런 게 없었다. 감독, 코치 선생님들이 볼 차주면 잡는 게 훈련이었다(웃음). 지금처럼 잔디에서 훈련하는 건 상상도 못 했고. 맨땅에서 몸을 날려가면서 훈련했다.

골키퍼 코치에게 배우는 건 뭐가 다른 건가.

고교 3학년 때 U-18 대표팀에 들어가서 골키퍼 코치에게 훈련을 받았다. ‘골키퍼 훈련이 이렇게 디테일하고 힘들었나’라는 생각이 바로 들더라. 골키퍼란 포지션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고, 캐칭, 다이빙 등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졌다. 김성수 코치(당시 U-18 대표팀 골키퍼 코치)께 잘 배운 덕에 프로에서 오랜 시간 뛸 수 있지 않았나 싶다(웃음).

그 당시의 경험과 2002년 이후 발전하는 환경을 보면서 유소년에 관심이 생긴 건가.

어릴 땐 체계적이지가 않았다. 배우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감독, 코치 선생님께 이야길 해도 공을 차주고 막으라는 게 전부였다. 지금도 환경은 좋아졌지만, 골키퍼 코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비용 때문에 골키퍼 코치를 두지 않는 팀이 많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골키퍼 코치 있는 팀을 찾기가 어렵기도 하고.

은퇴식(4월 20일)을 치른 지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진작부터 골키퍼 코치를 준비해온 거 같다(웃음).

1월부터 이곳저곳 연락하면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다. 지금까지 연락 못 했던 친구, 선·후배한테도 연락했다. 우선 ‘선수 생활하면서 자주 연락을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지. 다행히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이라 이해해주더라. 그렇게 현재 유소년 축구계가 어떤지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이쪽 길도 한 번쯤 고민해봐야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얘기 들어보면 골키퍼 코치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거 같은데(웃음).

일단 경험해 보려고 한다. 말로 듣는 거랑 실전에서 몸으로 느끼는 건 다르니까. 애들 수준도 어느 정도인지 말로만 들어선 알 수 없다. 지금은 주말에만 나가서 아이들 가르치는 거다. 하나뿐인 가족들과도 즐겁게 지내고 있고. 딸이 둘인데 매일같이 놀아준다.

소심했던 김용대 “처음 골키퍼 하라고 했을 때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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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까지 울산 현대 골문을 든든하게 지킨 김용대 골키퍼(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그래도 아직 김용대는 ‘용대사르’아닌가. 골키퍼 장갑을 처음 낀 순간은 언제였나.

초교 5학년 때 친구가 공 차자고 해서 나갔지. 그렇게 3일 공을 찼는데 축구부 감독 선생님 눈에 띄어서 하게 됐다. 사실 운동을 썩 안 좋아했다. 친구들끼리 놀 때 공차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해서 축구부에 들어갔는데 감독 선생님께서 ‘네가 골키퍼 하라’고 했다. 아(한숨). 솔직히 골키퍼 하기 정말 싫었다.

왜?

나도 앞에 나가서 공격하고 골 넣고 싶으니까. 골대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게 딱 봐도 재미가 없어 보였다. 당시에 5, 6학년 골키퍼가 1명씩 있었는데, 5학년 골키퍼가 그만두면서 감독 선생님께서 날 골키퍼로 점찍은 거다.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순발력이 특출 난 것도 아니었는데.

감독 선생님께서 골키퍼로서의 재능을 본 거 아닐까.

연습 경기 뛰고 감독 선생님께서 날 부르셨다. ‘용대야, 내일부터 6학년 선배한테 골키퍼 배워’라고 하시는 거다. 아. 내가 소심한 편이다. ‘저 골키퍼 하기 싫어요’라고 말은 못하겠고, 하긴 해야 하는데 그건 또 싫고. 남몰래 펑펑 울었다. 그때만 해도 골키퍼로 성공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지(웃음).

그때부터 한국 축구 대표팀 골키퍼를 꿈꾸며 나아간 건가.

초교 5학년 때부터 축구부 생활은 했지만 축구 선수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감독 선생님이 시키니까 열심히 했다. 부모님도 처음엔 반대했다. 운동은 힘들어서 안 된다고. 6학년 형이 나가면 골키퍼가 나밖에 없지 않나. 감독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와서 엄청나게 매달렸지. 부모님은 설득을 당하셨고(웃음).

본격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골키퍼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언제인가.

참 웃긴 게 난 진짜 소심했다. 내가 원해서 중학교 때도 축구를 계속한 게 아니다. 감독 선생님이 중학교 축구부와 연결해줘서 계속한 거다. ‘거기 가서도 축구 열심히 해’라고 하니까 ‘알겠습니다’라고 했지(하하). 하지만, 그땐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축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을까.

답이 나왔나.

먼저 선배들을 봤다. 축구를 잘하면 진학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진학 못 하는 선배도 많았다. 거기에 나를 대입해봤다. 진학을 못 했을 때 난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나 다른 길을 찾는다면 축구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까. 지금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지만, 이전엔 축구만 했다. 그래서.

그래서?

결심했다. 축구가 적성에 맞고 재미있으니까 여기서 성공하자고.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온 힘을 다했다. 감독, 코치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하고 연습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했다. 어떻게 하면 공을 더 잘 막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선 어떤 판단이 옳은 걸까. 이미지 트레이닝을 정말 많이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

나는 훈련과 이미지 트레이닝의 비중을 4:6으로 잡았다. 축구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한테도 얘기한다. 훈련이 끝나면 몸은 쉬어라. 대신 머리로는 정리를 하고 다음 상황을 그려보라고. 어떤 게 잘 됐는지 생각하고, 잘못된 건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연구하는 거다. ‘내일 훈련장에선 이런 부분에 중점을 둬야겠구나’란 계획이 세워지면 일과를 마치는 거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깊었다.

소심했으니까(웃음). 소심한 애들은 두 가지다. 단점이 심하면 많이 움츠러든다. 장점은 생각이 많다. 여기서도 단점이 있는데 잡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 나아가야할 길에 있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감독, 코치가 말하는 게 정답은 아니다. 길을 제시해줄 뿐이고 답을 찾아가는 건 나 자신이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고 답을 찾으면 희열을 느끼고 성장하는 거지.

축구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 꼭 해줘야 할 말인 거 같다.

주말에 레슨 나가면 아이들한테 얘기해준다. 내가 그렇게 성장했으니까 너희들도 해보라고. 다만 ‘내가 말하는 게 정답은 아니라고’도 말해준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지 정답을 말해주는 이는 아니라고. 최대한 아이들과 소통하려고 한다. 먼저 다가가 장난치고, 즐겁게 축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하지만.

하지만?

수업을 진행할 때만큼은 집중하자고 강조한다. 아이들이 산만하거나 수업을 도저히 진행할 수 없을 땐 한 마디 한다. 1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시간인데, 그 아이들이 내가 가진 노하우를 최대한 가져갔으면 좋겠거든. 결국엔 자기 선택이다. 자기가 큰 꿈을 갖고 나아가면 성공하는 거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는 거고.

어린 시절 웃으면서 축구 했나.

힘든 기억뿐이다(웃음). 특히나 개인 운동이 정말 힘들다. 축구 선수의 꿈을 가진 뒤부터 순발력 향상을 위해 줄넘기를 빼놓지 않고 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하기 싫은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생각을 바꿨다.

어떻게?

프로 선수가 되면 돈을 버니까 2단 뛰기 한 번 할 때마다 내 몸값이 만원 더 늘어난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셋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만 원, 2만 원, 3만 원 이렇게 줄넘기를 했다(하하). 생각을 바꾸니까 하기 싫은 날에도 운동하게 되더라.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아이들한테도 얘길 해준다. 힘들 땐 생각을 바꿔보라고. 힘든 거 이겨내면 결국엔 다 본인 자산이다. 그런데 무리는 하지 말라고 한다. 부상당하면 안 되니까. 운동하기 전에 스트레칭 확실히 하고, 화려한 것보단 하나씩 차근차근히 해 나가라고 한다. 다치면 아무 소용없다고 강조한다.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라서 아이들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 같다. 특히나 엘리트 코스만을 걸어온 전설의 조언 아닌가.

과찬이다(웃음). 묵묵히 해야 할 일에 집중한 선수였다. 머릿속으로 많이 고민하고 대화하고. 그러다 보니 기회가 오더라. 고교 3학년 때 처음 대표팀(U-18)에 뽑혔다. 처음이다 보니 의욕이 넘쳤다. U-15 대표팀부터 골문을 지켜온 친구가 있어서 난 후보였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죽자 살자 운동만 했다.

그렇게 대표팀 주전으로 올라선 건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당장은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더라도 묵묵히 제 할 일 하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내가 그랬으니까. 특히나 아마추어와 프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프로에서 살아남는 건 아마추어 때 잘한 선수가 아니라 이전부터 꾸준히 땀 흘려온 사람들이다. 그래도 프로 지명조차 못 받은 선수가 태반인 게 냉혹한 현실이다.

음.

유소년 시기에 이름 날리고 하는 거 정말 아무 소용없다. 아마추어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성인 대표팀으로 올라가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이런 거다. 18세 땐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던 선수였지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U-20, U-23, 성인 대표팀까지 올라가면 3분의 2가 바뀐다. 일단 문이 정말 좁다. 조그마한 문을 뚫기 위해선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될까 말까다.

얼마나 노력을 한 건가.

지도자가 가르치는 건 다 해봤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무조건 ‘정답’이라 생각하고 다 따라 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걸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크게 발전할 수 없다. 그러면서 버릴 건 과감하게 버리고, 내 것으로 만든 것만 가져가는 거다. 열심히 땀 흘리고, 훈련을 마치면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또.

또?

벤치에 앉아 있더라도 무언가를 배워가려고 항상 발버둥 쳤다. 성인 대표팀에 가면 난 최고가 아니었다. (이)운재 형, (김)병지 선배, (최)은성이 형 등 전설로 불리는 이들과 경쟁한 까닭이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운재 형의 안정적인 경기 운영, 병지 형의 빠른 판단력과 선방 능력, 몸 관리에서만큼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던 은성이 형의 자기관리 등 선배들의 장점을 보면서 내 것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돈 주고 할 수 없는 엄청난 공부지.

김용대 “난 지금도 공이 두렵다. 지름길로 가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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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명문 FC 서울에서 6년을 뛴 김용대 골키퍼(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얘기를 들어보면 선생님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모범생이다.

(하하). 조용한 성격에 묵묵히 자기 할 일하는 스타일이라 그렇게 보이는 거 같다. 아.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어떤?

우리 고교 시절엔 축구하는 애들끼리 랭킹을 매겼다. 협회나 언론에서 랭킹 순위를 매기는 게 아니라 출처가 불분명한 고교 선수 랭킹이었다. 당시엔 다들 어리니까 관심이 엄청 많지. 우리 땐 항상 1위가 (이)동국이었다. 어릴 때부터 워낙 유명했고 잘했으니까. 나도 어느 순간부턴 TOP 10에 들어가더니 1위까지 해봤다. 참. 누가 랭킹을 정해주는 지도 모르는 데 엄청나게 좋아했던 기억이 문뜩 떠올랐다(웃음).

초교 5학년 때부터 2018시즌까지 축구를 했으니 몇 년을 축구와 함께 한 건가.

선수 생활만 29년을 했다. 그런데도 축구가 어렵다. 아이들한테 하는 얘기도 이거다. 절대 너희들 지름길로 가려고 하지 말라고. 느리게 느껴지더라도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고. 오랜 선수 생활을 했어도 완벽히 알 수가 없는 게 축구다.

가장 어려운 게 있다면.

난 골키퍼지만 아직도 공이 무섭다. 상대 공격수가 가까이서 강력하게 슈팅을 때릴 땐 피하고 싶을 정도로 두렵다. 그래서 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땀 흘린 게 아닌가 싶다. 골키퍼는 퍼즐을 완성해 나아가는 과정이거든.

퍼즐?

퍼즐은 조각을 하나하나 알맞은 곳에 맞춰야 끝낼 수 있다. 골키퍼도 마찬가지다. 한 경기에서도 여러 상황과 마주한다. 상대 공격수가 슈팅을 감아서 때릴 때, 땅볼로 때릴 때, 문전에 있는 다른 선수에게 패스할 때 등 각 상황에 맞는 판단이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이 칸엔 이 조각이 들어맞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퍼즐을 맞추듯이, 골키퍼도 그 상황에 맞는 조각이 있어야 한다. 결국엔 반복 훈련이다.

반복 훈련?

실전에선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한다. 생각하면 상대 슈팅을 절대 막을 수 없다. 먼저 움직이고 생각은 나중이다. 기본기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난 어릴 적 공을 땅에 튀겨서 잡아내는 캐칭을 온종일 했다. 크로스가 올라오면 이걸 쳐낼 건가 잡아낼 건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몸이 알아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인 거다.

골키퍼가 참 어렵다.

절대 쉬운 포지션이 아니다. 운동량도 많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현역 선수들은 무언가 물어보면 답변을 잘 못 한다. 몸이 그냥 저절로 반응하는 게 많으니까. ‘이런 상황에선 당연히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거지.

2002년 프로에 데뷔한 김용대 “프로의 세계는 또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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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대표팀 수문장이었던 김용대(사진 맨 왼쪽 위)(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처음엔 쉽지 않은 골키퍼를 시켜 펑펑 울던 소년이 2002년 프로 선수가 됐다(웃음).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했을 때 기억하는가.

어떻게 잊나. ‘아 드디어 프로 선수가 됐구나’란 마음에 마냥 좋았다. 그런데 기쁨은 오래가지 않더라. 여긴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걸 금세 느꼈다.

왜?

나름 U-18 대표팀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거쳤다. 1999년 U-20 월드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주전 골키퍼로도 뛰었다. 하지만, 프로에선 경력이 아무 소용없더라. 다시 시작이다. 형들이랑 게임을 뛰는 데 긴장감이 장난이 아닌 거다. 순탄할 줄만 알았던 첫 시즌 8경기 출전 14실점의 기록으로 마쳤다. 스스로 ‘부족하다’란 걸 크게 느꼈지.

프로는 또 다른 무대구나.

사실 훈련이 힘든 건 아니다. 훈련량이나 강도만 보면 U-18 대표팀 시절이나 대학 때가 훨씬 더 힘들었다(웃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의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더라. 프로 데뷔 시즌엔 고생을 참 많이 했다.

프로에서의 출발이 불안했다.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건 언제부터인가.

첫 시즌 고생을 좀 하니 2년 차 때부턴 자리가 잡히더라. 특히나 故 이안 포터필드 감독께서 신뢰를 보내주셨다. 시즌 초반에 경기력이 좋지 않았는데 계속 믿어주셨다. 그러면서 경기력이 올라왔고, 36경기를 뛰었다. 2004년엔 FA컵 우승 트로피도 들어 올렸다. 포터필드 감독님 덕분에 프로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2006년엔 당시 최고의 팀이던 성남 일화 천마(성남 FC의 전신)로 이적했다.

부산이랑은 좀 달랐다. 당시 부산은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포지션별로 K리그 최고의 선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성남은 달랐다. 과감한 투자로 정상급 선수를 불러 모으던 팀이었다. 실제로 이적 첫해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두 번째 시즌엔 준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축구 대표팀 못잖게 선수층이 탄탄하다 보니 살아남으려고 운동을 정말 많이 했었다(웃음).

병역(2007.11~2009.10)을 마치고선 FC 서울로 이적해 6년을 뛰었다.

서울에서도 우승을 두 번이나 했다. 2013년엔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도 경험했고. 성남, 서울 모두 좋은 기억이 많다. 특히나 서울은 한국 축구의 성지인 상암월드컵경기장을 홈으로 쓰지 않나. 팬들의 열광적인 함성을 잊을 수가 없다. 서울에 있었을 때 여론의 관심도 많이 받았던 더 같다(웃음).

2016년엔 정든 서울을 떠나 울산 현대로 이적을 하게 됐다.

최용수 감독께서 (유)상훈이를 키우기로 결심하셨고, 그해 유현이 새로이 합류했다. 출전 시간을 위해 구단에 이적 요청을 해서 울산으로 가게 됐다. 서로 웃으면서 이별했다. 울산으로 갈 땐 ‘이제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마지막까지 좋은 경기력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땀을 아끼지 않았던 거 같다(웃음).

울산에서도 3년을 뛰었다.

처음엔 1년 계약을 맺고 갔다. 땀의 결실인지 2016시즌을 마치고 2년 연장계약을 맺고 지난 시즌까지 뛴 거다. 은퇴식도 마지막을 함께 한 울산에서 성대하게 열어줬다. 웃으면서 떠날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감사하다(웃음).

프로 생활만 17년 했다. 은퇴를 결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쉬웠다면 거짓말이지. 고민하면서 힘든 것도 있었고 서운 것도 많았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U-18 대표팀을 시작으로 순탄하게 프로에 입단했고 17년을 뛰었다. 누군가에겐 꿈같은 인생을 살았다. 감사한 일이다. 또 경쟁 사회 아닌가. 감독, 코치들의 결정을 존중했다. 내 몸 상태가 좋다면 더 뛸 수 있었지만, 이젠 이전 같은 경기력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는 판단도 내렸고.

4월 20일 은퇴식에선 양복을 입었다. 축구화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들어설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을 거 같다.

양복을 입는 날이 1년에 많아야 두 번이다. 12월 결혼식 때나 입지 거의 안 입는다(하하). 그래도 마지막 팬들에 인사드리는 건데 최대한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그라운드에서 잘 마무리한 거 같다. 슬픔보다 감사한 마음이 컸다. 스스로에게도 칭찬해줬다. 그동안 묵묵히 잘 달려왔고 수고했다고. 음(잠시 생각에 잠김).

음?

U-18 대표팀 때부터 응원해준 ‘파르마’란 팬클럽이 있다. 당시엔 다 학생이었는데 이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다(웃음). 전국 각지에서 울산으로 와서 은퇴식을 축하해줬다. 다 같이 모여서 차 한잔하면서 옛날 얘기하고 좋은 시간 보냈다. 거기서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하더라. 은퇴식인데 슬프지 않냐고.

그래서 뭐라고 답했나.

은퇴식 하기 전부터 지인들에 얘기했다. 난 슬퍼하지 않을 거고 웃으면서 그라운드를 떠날 거라고. 어찌 보면 이제 인생의 전반전을 마친 거다. 후반전엔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제2의 전성기를 위해 달려나갈 테니까 지켜보고 응원해달라고 얘기했다. 힘차게 나아갈 테니 응원, 관심 부탁한다고(하하).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한국 축구 대표팀 김용대에겐 아쉬움이 남아있을 거 같다.

솔직히 많다. 프로팀에선 늘 주전이었다. 하지만, 대표팀에선 2인자로 쭉 남아 있었다. 2000년에 대표팀에 데뷔했지만 주전 선수로 뛴 날이 많지 않았다. 가족들이나 팬들도 이 점을 가장 아쉬워했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실망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지 않나. 나에겐 소속팀이 있으니까 그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리고?

처음 축구 선수를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목표로 한 게 대표팀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다치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렇게 보면 목표를 이룬 거다. 또.

또?

대표팀에서 배운 게 정말 많다. 운재 형, 병지 선배를 보면서 내게 없는 장점을 흡수하려고 정말 많이 연구했다. 그런 걸 어디서 보고 배울 수 있겠나. 그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자로 나아간다면 대표팀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거 같다.

대표팀이 아니었다면 벤치에 앉아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몰랐을 거다. 하지만, 대표팀에서의 경험 덕분에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알게 됐다. 그럴 때일수록 실망하고 좌절하기보단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걸 배웠고. 경험이 없으면 이런 걸 후배들에 알려줄 수가 없지 않나(하하).

"제2의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중.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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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김용대(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은퇴한 이후에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있다. 제2의 인생의 목적지는 언제쯤 정해질 거 같나.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거 아닌가. 조급해하지 않고 많은 걸 경험하면서 나아가고 싶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는 짜인 스케줄에 맞춰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이젠 내가 알아서 계획을 짜고 맞춰가야 한다. 쉽지가 않다(웃음). 지금은 제 인생의 목표를 찾아가는 과정인 거 같다.

은퇴한 선수들 얘길 들어보면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남다르다고 하던데.

물론이다. 선수 땐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집엔 공주님이 세 분계신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내 일과는 두 딸과 매일같이 놀아주는 거다(하하). 공부는 아내가 맡는다. 여유가 있을 땐 가족들과 나들이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은퇴 뒤에도 웃으면서 지낼 수 있어 감사하다.

정말로 얼굴이 밝다.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실제로 감사한 마음이 크다 보니까 그런 거 같다.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고, 선수 생활하면서 연락하지 못한 지인들 만나 수다도 떨고.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재밌다. 의류 모델 일도 새로운 도전이지만 즐겁게 하려고 하고, 유튜브랑 예능 방송 출연도 늘려나가고 싶다. 두려움도 있지만 설렘이 있어서 더 좋아 보이는 게 아닐까.

평생 함께한 축구가 서운할 수 있겠다(웃음).

(하하).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인생을 살 수 없었다. 내게 축구는 ‘에너지’다. 축구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축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한적한 시골 아저씨가 돼 있었을 거다. 축구하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고, 가족이 생겼다. 소중한 지인들과 인연을 맺게 됐고, 박수받는 사람이 됐다. 축구에 정말 고맙다(웃음). 난.

난?

다시 태어나도 축구를 하고 싶다. 다시 한 번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를 선택할 거다. 그땐 한국 축구 대표팀 수문장이 돼서 월드컵도 뛰어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세계적인 선수들이 득실한 유럽 무대도 도전해보고 싶고. 그 정도로 축구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 에너지이자 내 삶의 전부다.

아.

이젠 내가 받은 사랑을 남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집안 사정이 제각각이다. 잘 사는 아이들도 있지만, 축구화나 골키퍼 장갑 등을 사는 것조차 어려운 친구들도 있다. 그런 친구들을 도와줄 거다. 큰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에겐 재활 센터를 연결해줘서 하루빨리 그라운드로 복귀할 수 있게끔 다리를 놔주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다(하하).

새로운 꿈도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골키퍼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엔 골키퍼 아카데미가 없다. 필드 플레이어는 30명에 가깝지만, 골키퍼는 많아야 3명이다. 수요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 골키퍼란 특수 포지션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아카데미를 만들어 보는 것. 생활 체육 쪽에서도 골키퍼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더라.

생활 체육?

얼마 전에 개그맨 양상국 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했다. 상국이가 골키퍼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인터넷 찾아가면서 공부하고 경기를 뛴다. 골키퍼 출신이다 보니 이런 사람들 보면 막 도와주고 싶다(하하). 기회가 되면 골키퍼 전문 채널을 만드는 것도 생각 중이다.

꿈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가(하하).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도록 정말 많은 분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골문을 지키는 사람들에 한 마디 해야 할 거 같다.

골키퍼는 정말 매력적인 포지션이다. 공격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하는 포지션이 아니다. 팀의 마지막 희망 아닌가. 향후에 지도자가 되든 채널을 열든 골키퍼를 가르치겠지만 함께 고민하고 소통했으면 한다. 내가 말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조언해줄 뿐이지. 앞으로도 골키퍼 포지션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하하).

성공한 축구 인생을 살았다. 제2의 김용대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한 마디 해준다면.

현재에 만족하지 말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자신감은 갖되 자만심은 멀리하라는 거다. 아마추어 때 잘하는 건 정말 아무 소용없다.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가 된다면 세계 선수들과 경쟁해야 한다. 축구화를 벗는 날까지 배움과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올라서는 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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