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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헬멧에 새긴 충무공… 임전무퇴 각오로 한국 골문 지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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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선수권 2부 리그 출전 男아이스하키 수문장 맷 달튼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적의 공격, 거듭되는 패전(敗戰), 흩어지는 동료, 열악한 본국의 지원.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의 수문장 맷 달튼(33)의 헬멧엔 명량 바다에 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지난 19일 진천선수촌에서 막바지 훈련 중인 달튼을 만나니 이순신 장군의 장계 한 대목이 떠올랐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신(臣)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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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달튼은 "주유소가 두 개뿐인 캐나다 시골에서 자랐다. 그런 내가 한국 대표팀 일원으로 일궈낸 성취에 대해 운명적인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평창올림픽 때 빙판 위에서 느꼈던 감동을 후배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새겨진 맷 달튼의 헬멧(오른쪽 사진), 뒤편엔 태극기를 그려넣고 뛴다. /신현종 기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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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 충무공' 맷 달튼

대표팀은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2019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1 그룹 A(2부 리그)에 출전하기 위해 지난 23일 출국했다. 2년 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2위에 올라 이듬해 월드챔피언십(1부 리그)에 승격했던 기적을 재현하는 것이 공식 출사표다. 오는 29일 헝가리와 1차전을 치른다.

목표 달성은 쉽지 않다. 세계 랭킹 16위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벨라루스(14위), 슬로베니아(15위), 카자흐스탄(18위), 헝가리(20위), 리투아니아(21위)와 겨룬다. 팀마다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에서 뛰는 자국 선수들을 합류시키며 최정예 전력을 꾸렸다. 평창올림픽 이후 발전이 없는 한국 아이스하키는 객관적 전력에서 하위권이다. 월드챔피언십 승격보다 꼴찌를 면해 3부 리그 강등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경기 중 교체가 없는 골리는 아이스하키 전력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달튼의 활약에 대표팀 명운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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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표팀엔 귀화 선수가 달튼을 포함해 셋이다. 모두 안양 한라 소속이다. 평창올림픽 땐 7명이었다. 한 명은 은퇴했고, 다른 셋은 대표팀 차출을 거부했다. 올림픽이 끝난 태극 마크는 매력이 없다. 달튼은 달랐다. 그는 "한국에서 넘치게 받은 사랑을 하키로 되갚고 싶다. 대표팀이 나를 아직도 필요로 한다는 게 기쁘다"면서 "올림픽만 참가하려고 귀화한 게 아니다. 앞으로 3~4년 더 한국 대표로 뛰고 싶다"고 말했다. 달튼은 아이스하키 아시아리그가 끝났지만 고향 캐나다행을 미루고 진천선수촌 3주 합숙 훈련과 일본 전지훈련까지 빠짐없이 소화했다. 그는 "두 살배기 아들과 있는 아내가 '대표팀에 꼭 가야 하느냐'고 묻길래 '당연하다'고 답했다"며 "스포츠에서 당연한 승리나 패배는 없다. 특히 얼음판은 미끄럽다. 한국이 올림픽 경험을 살리면 5전 전승을 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평창 계승 위해선 상무팀이 절실"

올해로 한국 생활 6년째. 캐나다 출신인 달튼은 러시아대륙간리그(KHL)에서 뛰다 2014년 안양 한라와 인연을 맺었다. 특별 귀화(이중국적)는 2016년 3월에 했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달튼의 합류 이후 급성장했다. 월드챔피언십 승격과 평창올림픽 참가는 달튼이 뒷문을 지켜줬기에 가능했다. 그의 태극 마크 성적은 10승 24패. 1승도 못 거둔 평창올림픽처럼 진 날이 숱하다. 달튼은 "한국 선수들의 기량이 몰라보게 늘었다. 져도 아깝게 진 경기가 많다"고 의연했다.

고민을 묻자 아이스하키 상무팀 해체를 꼽았다. 달튼은 "평창 세대가 국제대회에서 기적 같은 성취를 해내며 경험치를 쌓았는데, 이걸 이어받을 미래 세대가 없다"면서 "전성기 선수가 얼음 밖에서 2년을 보내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다른 종목처럼 상무팀을 유지시키고 선수층을 키워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도전이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달튼은 헬멧에 충무공을 일부러 그렸다. 올림픽에선 '정치적 표현' 문제로 못 썼지만, 이번 대회엔 충무공과 함께한다. 달튼은 "한국 역사 공부를 하다가 이순신 장군의 처지가 한국 아이스하키가 맞닥뜨린 현실과 비슷하다고 느꼈다"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한국의 골문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아득한 적을 한 줄기 일자진으로 맞이했던 충무공의 마음으로 한라성(달튼의 한국 이름)이 빙판에 섰다.

[진천=양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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