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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무기와 표적]러시아 고물 항공모함 고쳐주겠다, 중국이 손 내미는 속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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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항공모함 쿠즈네초프가 2016년 10월 영국해협을 지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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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맡겨 달라. 완벽하게 고쳐줄게. 우리가 남도 아닌데.”

고장 난 자전거나 TV 얘기가 아니다. 현존 최강의 화력을 갖춘 ‘현대전의 꽃’ 항공모함을 두고 나온 말이다. 대체 얼마나 배짱이 두둑하길래 이렇게 화끈한 제안을 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손을 내민 쪽은 현재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중국, 한낱 재활용센터 주인으로 내몰린 상대방은 한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러시아다.

러시아의 굴욕, 중국에는 기회

중국이 달려든 먹잇감은 러시아의 항모 ‘아드미랄 쿠즈네초프(5만8,600톤)’다. 구 소련 붕괴 직전인 1991년 취역해 28년이 지난 노후함정이지만 러시아 유일의 항모라는 상징성 때문에 애물단지로 남았다. 2016년 시리아 군사작전에 투입돼 이슬람국가(IS) 격퇴에 앞장서며 건재를 과시하는가 싶더니, 갑판이 짧아 함재기가 착륙도중 바다에 빠지거나 고장이 잦아 링거 맞은 환자처럼 아예 예인선을 옆에 달고 다니면서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미국이 11척의 항모로 전세계 바다를 지배하는 것과 하늘과 땅 차이다. 더구나 재래식 디젤 엔진이어서 미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비해 성능도 한참 떨어진다.

반면 중국에게 쿠즈네초프는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다. 지난 23일 중국 해군 창설 70주년 관함식에서 위용을 뽐낸 항모 랴오닝(6만7,500톤)은 1998년 경제난으로 건조가 중단된 쿠즈네초프 2번함인 바랴그함을 들여와 개조를 거쳐 2012년 배치한 일종의 리모델링 제품이다. 중국이 최초의 항모라며 떠들썩하게 선전하고 있지만 막상 족보를 따지면 잔뜩 주눅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쿠즈네초프는 ‘해양 굴기(崛起ㆍ우뚝 섬)’에 박차를 가하며 군사대국을 꿈꾸는 중국 해군력의 ‘교범’인 셈이다.

그런데 중국이 이처럼 고맙고도 찜찜하던 러시아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가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지난해 10월 러시아 북부 수리공장에서 항모를 띄우던 도중 부유 도크가 침몰해 대형 크레인이 추락하면서 이 항모 갑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설상가상으로 항모를 감당할 만한 다른 도크는 멀리 떨어진 흑해에 있고, 러시아 기술력으로 항모의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어 그대로 방치된 상태다. 2025년까지 운용하려던 쿠즈네초프가 갑자기 파손되면서 당장 추가 함정을 건조할 수도 없는 처지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구의 제재에 막혀 자금도 충분치 않다.

이에 중국은 관영매체를 통해 “쿠즈네초프를 퇴역시키지 않을 방법은 우리밖에 없다”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전문가를 보내 수리할 수도 있지만, 이미 항모가 정박할 부유 도크가 없어진 터라 중국으로 갖고 와서 고치면 된다는 논리다. 특히 이달 관함식을 계기로 중국의 해군력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처럼 노골적인 제안은 더 두드러졌다. 최초의 국산개발 항모인 산둥(8만5,000톤)이 막바지 작업 중인데다, 이보다 큰 세 번째 항모(10만톤)는 원자력 추진 방식으로 건조할 계획이어서 얼마든지 쿠즈네초프를 원상 복구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중국의 한 군사전문가는 “돈도 없고 시설도 없는 러시아는 항모 한 척도 없는 빈털터리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남을 것이냐”며 “쓸데 없이 제3의 길을 찾지 말고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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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항모 쿠즈네초프가 2010년 무르만스크의 정비공장에서 도크에 실려 수리를 받고 있다. 타스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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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러 공조, 미국 포위망 돌파, 기술력 과시 다중포석

물론 러시아가 중국의 제안을 수용할 리는 만무하다. 핵심 군사기술이 유출되는 것은 물론, 중국으로 항모가 끌려가는 전대미문의 수모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중국이 ‘못 먹는 감을 괜히 찔러 보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하지만 중국은 러시아를 보챌수록 남는 장사다. 우선 전략무기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항모를 고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체가 양국의 신뢰관계를 보여준다. 가령 한국과 일본이 모두 도입한 미국 스텔스전투기 F-35의 경우, 일본은 국내에서 기체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창정비를 할 수 있지만 한국은 큰 고장이 나면 일본이나 미국에 맡겨야 한다. 미국이 일본에만 정비 권한을 준 탓이다. 최근 일본의 F-35 추락사고에도 불구하고 미일 관계는 갈수록 공고해지는 반면, 한미 관계는 파열음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같은 군사적 신뢰와 무관치 않다. 중국이 산둥반도에 ‘러시아판 사드’로 불리는 S-400 미사일을 배치해 미국에 맞선 요격망을 갖추며 러시아와의 우의를 과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해양 봉쇄정책인 인도ㆍ태평양 전략에 맞서 포위망을 뚫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비핵화가 지지부진해 애를 먹이는 북한을 제외하면, 러시아는 중국이 군사적으로 사실상 유일하게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우방이다. 지난해 9월 중국과 러시아가 극동지역에서 탈냉전 이후 최대 규모인 30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올해는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군사공조의 범위를 바다로 넓혔다. 미국이 호주ㆍ일본과의 훈련 빈도를 높이며 옥죄자 중러 양국은 이달 말 연합 해상훈련으로 맞대응에 나설 예정이다.

더구나 비동맹 진영의 리더를 자처하며 미국을 향해 함께 목소리를 높이던 인도가 오락가락하면서 중국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5~27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일대일로(一帶一路ㆍ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정상포럼에 끝내 불참하기로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곧바로 날아와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회동하는 성의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인도에 이어 일본마저 항모 경쟁에 뛰어들면서 중국도 한걸음 달아나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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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인 랴오닝함. 러시아 쿠즈네초프 2번함을 들여와 개조한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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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쿠즈네초프를 들먹일수록 대내외적으로 중국의 기술력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생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내건 시 주석의 강군몽(强軍夢)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중국의 항모는 미국과 달리 ‘스키 점프대’처럼 갑판 끝이 올라가 있다. 전투기를 띄우는 전자식사출기와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출력계통 모두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전투기 출격은 미 항모의 30%선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올해 관함식에 자체 개발 산둥호를 끝내 선보이지 못하고 선체 내부 영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항모 제작사인 중국선박중공업그룹의 쑨보(孫波) 사장이 지난해 항모 관련 기밀을 외국 정보기관에 넘긴 혐의로 경질되면서 세 번째 항모는 언제 추진할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다. 한껏 높아진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기에 역부족이다. 따라서 항모 랴오닝ㆍ산둥의 초기 버전인 쿠즈네초프를 깎아 내리며 중국이 언제든 고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건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묘안인 셈이다.

베이징=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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