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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9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악몽" …6ㆍ25전쟁에 참전한 영국 3형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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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 24일 부산 UN군 묘지에서 매리 애니 스콧이 큰삼촌 윌리엄 로리머의 묘지룰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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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한국을 위해 영국의 3형제가 6ㆍ25전쟁에 참전했다. 큰 형과 둘째는 전쟁터에서 실종이 됐다. 막내에게마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여론이 안 좋게 변할까 우려한 영국 정부가 그를 전선에서 빼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한 사연은 영국의 로리머 가문의 가족사(史)였다. 로리머 집안의 매리 애니 스콧이 국가보훈처의 6ㆍ25 참전용사 재방한 프로그램으로 지난 21일 한국을 찾았다.

매리는 로리머 3형제의 둘째 토머스 라이트 로리머의 딸이다. 토머스는 1951년 10월 1일 왕립 얼스터 보병연대(Royal Ulster Rifles) 소속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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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주영 한국 대사로부터 6ㆍ25전쟁 참전용사 메달을 받은 토머스 라이트 로리머(오른쪽)과 부인 캐시 로리머. [매리 애니 스콧 제공]






Q : 3형제가 모두 참전한 이유는.

“북아일랜드의 로리머 가문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다. 3형제 모두 같은 연대에 입대했다. 큰삼촌이자 맏이인 윌리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군인이었다(40년 5월 덩케르크철수작전에도 참가). 51년 4월 25일 임진강 전투에서 33세의 나이로 전사했다(당시 실종처리됐으나 나중에 전사로 판명). 내 아버지 토머스는 채근현 전투(영국에선 해피밸리(Happy Valley) 전투로 알려짐)에서 실종됐다. 당시 중공군의 포로로 잡힌 것이다. 대니얼 막내 삼촌은 참전 4개월 만에 귀국했다.”



Q : 아버지의 포로생활은 어떠했다고 하나.

A : “아버지는 평양으로 끌려갈 때 산을 하나 넘으면 또 산이 나오는 게 기억난다고 했다. 도중 숨진 다른 포로의 발에서 군화를 벗겨 덧신었다고 했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날씨는 반대로 여름엔 너무 더웠다고 했다. 중공군이 포로수용소를 관리했는데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뤘다고 했다.”




Q : 아버지는 어떻게 포로생활을 이겨냈나고 한.

A : “정전(停戰)이 가까워지면서 중공군이 좀 풀어줬다고 했다. 가끔 하는 스포츠가 낙이었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는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포로생활을 견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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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5일 임진강 전투에서 33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로리머. [매리 애니 스콧 제공]






Q : 아버지가 한국을 방문적 있나.



“없다.”



Q : 왜 그런가.

A : “아버지는 지금 연세가 90인데 평생 전쟁 얘기를 거의 안 했다. 아직도 때때로 악몽을 꾼다. 한국에 오면 전쟁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딸인 내가 대신 방한해 무척 기뻐했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Q : 6ㆍ25전쟁이 로리머 가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는 참전을 후회한 적 있나.

A :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전쟁 얘기를 거의 안 했다. 지금 옆에 있다면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아버지는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철재 기자 seaj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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