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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진달래, 마음을 낚다 - 여수 영취산(靈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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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취산의 능선을 따라 진달래가 지천이다.

● 산으로 가는 길

여명(黎明)이 기척도 않는 새벽 시간에 산엘 올랐다.

늦은 밤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여정은 새벽녘 산 아래에다 사람들을 기어이 부려놓았던 것이다. 제철 꽃구경의 지난함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낮 시간에는 꽃보다 사람이 더 많다는 엄포(?)는 새벽에도 산을 오를 수 있고, 또 올라야 하는 당위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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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데~ 어쩌랴... 왔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우산을 들고, 랜턴을 비추며, 오로지 앞 사람의 발걸음만을 무작정 좇으며 새벽의 어두운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다 뒤돌아본 여수시내의 전경이 이른 시간임에도 환하다. 도시는 어쩌면 낯선 이방인의 이른 방문보다도 먼저 깨어, 또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아마도 여수 산업단지의 많은 공장들은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던 그 순간부터 깨어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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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른 산은 여수의 영취산(靈鷲山, 510m). 진달래가 고운 그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영취산이란 이름은 흔하다. <대동여지도>에만도 같은 이름의 산이 8개나 된다고 한다. 원래 영취산은 불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王舍城) 주위에 있던 산인데 석가모니의 설법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여수의 영취산이라는 지명도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그 영취산과 산 모양이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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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여! 붉음이여!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비가 그치고 미명이 산을 넘어오자 진달래가 점령한 산의 실루엣이 여행자를 반긴다. 아! 그래... 이것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의 피곤함을 마다하고 산을 올랐던 것이었구나. 감탄과 감사가 어우러진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미명에 검은 빛과 빨간 제 빛 사이의 어느 중간쯤의 거무스름한 빛깔의 꽃들이 온 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게 산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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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그들이 속해 있는 시간이 아직은 미명의 어느 중간쯤일지라도 그들의 곱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꽃은 꽃이었고, 그마저도 온 산을 불태우는 화염 덩어리였던지라 무엇이 더 필요했을 것인가.

산을 오르다 등성이에 서서 지나온 길을 무심코 돌아보자, 저 꽃들을 헤치고 이곳에까지 이르렀나 싶을 정도로 꽃들이 지천이다. 그리고 그 꽃 너머로 여수 시내와 그 너머의 남해 바다가 보인다.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이곳은 돌산도(突山島)와 경상남도 남해도(南海島)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좌수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취산의 진달래는 임진년의 그날에도 붉은 함성을 내질렀을지...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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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따라 진달래의 무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사실 이 꽃들의 향연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꽃을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일 것인가. 보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이 정답이 아닐까 싶다.

자~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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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중년

이렇듯 꽃이 피고 나무에 물이 올라 푸르름이 더해갈수록 무심히 걷는 와중에 '아! 봄이 왔구나.' 하고 부지불식간에 읊조릴 때가 많다.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걸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꽃이 피고, 봄철 미세먼지 경보가 쉴 새 없이 스마트폰으로 날아드는 걸 보면서 시간은 또 벌써 한 웅큼이나 흘러가버렸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저 혼자 저만치서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나이가 중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면서 시간의 흐름은 더욱 가파르고 쏜살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가는 시간들이 안타깝고,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저런 생각도 많아지고, 그만큼의 계획도 분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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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년에 이르러서는 몸과 마음을 써서 누군가의 심장을 울리는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람처럼 떠돌다가도 돌아와 기대어 쉴 수 있는 단 한 명의 누군가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도 말한다. 결국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실제 돌아보면 회한만이 가득해지는 때가 중년의 시간들이 아닐까 싶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단 하나뿐인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성취하였으며, 그 성취한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이었던가에 대한 회의가 몰려드는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년이 된다는 것은 조금씩 젊은 시절의 나를 잃어가고 있는 중이며,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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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중년의 시간들이 마냥 아쉽고 안타까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릴 적 내가 바라보던 중년의 그 아저씨와 아저씨인 내가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늙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많은 희망들이 나아가는 나의 길 위에도 흩뿌려져 있음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며, 그렇게 최소한 아직은 절망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도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젊다고 우기고도 싶고, 아직도 원하는 것도 많고, 아직도 하고 싶은, 또 해야 할 일도 산더미 같이 많기만 하다. 다만 시간이 계속 대책 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그렇게 남아 있는 세월 앞에서 마음만 조급해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아직은 다른 어떤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은 크게 다행스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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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그 시간, 그 시간들의 뭉텅이인 세월마저도 스스로 활용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직도 시간은 많고 할 일도 많다. 시간을 사용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밀도'라고 했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길고 지루한 반면, 무언가에 몰두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는 시간이야 원래 빨리 지나가고 그래서 짧은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서둘러 가는 시간을 탓할 일도 아닌 것이다.

사실 삶에 어떤 기준이 있을 것이며, 또 특별한 의미라는 것 역시 따로 있지 않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저 각자의 속도와 스스로 만든 기준 안에서 살아가면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그냥 살다, 또 그렇게 그냥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삶에 의미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게 꼭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각자의 몫이고, 그렇게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아름다운 꽃들과 얼마나 오랜 시간을 더불어 보낼 수 있을지 그것이야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이곳 영취산 진달래 숲에서 그들과 함께 노닐고 있다는 사실이다. 뭘 더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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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마음을 빼앗다.

영취산 진례봉(510m) 정상에 서자, 아 바람이 세도 너무 세다. 꽃들을 시샘이라도 하는 양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날려버릴 기세로 바람이 불어온다. 저 소백정맥을 넘어오는 바람인지, 아니면 멀리 태평양을 거슬러 올라오며 쓴 맛, 단 맛 다 맛본 바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람은 거칠고, 또 사나웠다.

그 와중에도 진달래 무리는 한 닢의 꽃잎도 잃을 수 없다는 듯 무리를 지어 서로 어깨를 기대며 스크럼을 짜고 바람과 맞선다. 그랬을 것이다. 이 높은 산중에다 뿌릴 내려 꽃을 피우기로 마음먹은 처음의 그날에도 바람은 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들이 이렇듯 아름답게 살아남아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서로 어깨를 내어주고 또 빌어 두 손 맞잡고 '함께' 싸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나'는 약해도 '우리'는 강한 법이다.

그런 연대의 힘으로 그들은 오늘도 비록 한 뼘씩일지라도 그들의 영토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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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산 정상을 지나 하산의 아쉬움에 걸음이 무거워질 무렵, 산은 또 다른 봉우리로 상춘객을 안내한다. 영취산 시루봉(418m)이다. 마치 정상에 시루를 얹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 아래에서 보는 시루봉은 그 이름처럼 펑퍼짐해 보이지만, 오르는 여정은 암벽 사이로 놓여진 덱으로 만든 계단을 쉼 없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그 여정 속에서 오롯이 걸음에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이곳 저것에서 고개를 내밀며 아는 체를 하는 진달래의 밝은 낯빛을 외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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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잔뜩 심술 난 아이처럼 찌푸린 하늘이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양 살며시 열리더니, 선물인 양 햇살을 산 위로 무차별 투하한다. 역시 빛살을 머금은 꽃이라야 제대로다. 그래서인지 더욱 곱다. 심통 가득한 하늘이거니 했는데, 이렇게 짧은 순간이나마 빛살이 번지니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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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자, 이제는 길과 나란히 늘어선 벚꽃들이 지천이다. 벚꽃뿐이랴. 홍매화와 제비꽃이며 양지꽃 등 야생화도 이에 뒤질세라 얼굴을 내밀기 바쁘다.

다만 야생화는 눈 밝은 이에게만 제 모습을 허락하는 꽃이니 길 위에 서거든 눈을 크게 뜨시라. 그리고 혹여 그들을 만나거든 눈으로만 예뻐하시길~ 그들이 여린 탓도 있지만, 그들은 나중에 올 뭇 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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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산과 들이 꽃으로 뒤덮이던 날, 그날 봄은 내게로 왔었다. 그날이 가장 화려했던 봄날이었는지는 알 순 없지만, 봄은 아름다웠고, 또 부드러웠다.

아직도 계절은 봄이다. 아직도 꽃들은 지천으로 피어 있고, 제 밝은 낯빛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중이다.

사람들이여~ 같이 꽃맞이하러 가지 않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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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정

돌고개주차장 → 가마봉 → 영취산 진례봉 → 도솔암 → 봉우재 → 시루봉 → 상암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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