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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보문동 普門洞-천년 사찰 비구니 그리고 젊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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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은 안암동 뒤, 숭인동 낙산 그리고 한성대학교 가기 전 경동고등학교까지 길게 이어진 동네다. 동네 이름인 보문은 말 그대로 ‘넓은 문’으로, 유래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이곳에 있어 사찰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보문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많이 들어선 개량형 한옥 주택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비구니’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다. 이 중에서 비구니와 정순왕후는 보문동의 시작이자 역사다. 독특하게도 보문동과 그 인근 숭인동에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비구니 사찰이 세 개나 있다. 보문사, 미타사, 청룡사다. 게다가 이 사찰들은 수백 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보문동의 이야기 보따리’들이다.

보문사는 한국 불교 29개 종단 중, 또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다. 한국 불교의 격변기를 거친 후 1972년 비구니 수행 환경 수호를 비롯해 여성 권익과 위상을 높여 사회 발전에 공여할 목적으로 창종된 보문종의 본산 보문사의 시작은 고려 예종 때인 1115년 담진 국사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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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웃에 있는 미타사와 청룡사 역시 비구니 사찰이다. 미타사는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 고려 고종 때 950년 혜거 스님이 창건했고, 청룡사는 고려 시대 비구니 혜원 스님이 창건한 그야말로 천년 고찰이다. 이렇게 한 동네에 천년 역사의 사찰이, 그것도 비구니 사찰이 모여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청룡사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단종 비인 정순왕후는 이미 궁에서 나와 청룡사에 머물고 있었다. 매일 단종의 안녕을 기도하던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청룡사가 위치한 낙산 동망봉에서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1521년 정순왕후가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영조는 정순왕후의 애절함과 진심을 높이 사 봉우리 바위에 ‘동망봉東望峰’이란 친필을 내렸다. 당시 청룡사는 ‘정업원’이라 불렸다. 정업원은 궁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사 없는 후궁들이 나머지 여생을 보내는 장소였다. 임금의 사랑을 받던 후궁들은 임금이 죽어 바뀌면 궁을 나왔고 이 정업원에서 이승에서의 인연을 저승에도 이어가기를, 임금의 극락왕생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이 정업원을 조선 순조 때 청룡사라 이름 지었고 1954년 비구니 윤호가 중수해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 되었다.

천년을 이어 온 보문사가 이 보문동 자리에서 사람의 육신과 정신을 보듬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 전통과 공력을 받들어 동네 이름으로까지 ‘보문’의 뜻이 이어진 것이다. 누군가는 보문동의 특성을 들어 특히 이 근처에 위치한 성신여자대학교를 거론하며 ‘여성의 기’가 강한 지리라는 말도 있지만 보문동은 서울에서도 매우 젊은 동네다. 고려대생들이 언덕 하나 넘어 보문동에 상당히 많아 2030세대의 거주비가 높다. 또한 삼선교, 미아리, 숭인동과 동대문, 신설동과 청계천으로 연결되는 거점이다. 그런데 보문동은 번잡스럽지 않다. 보문동 사람들이 ‘센강’이라 부르는 큰 도로 옆 하천을 넘어서면 주택들이 줄지어 자리 잡은 거주 지역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구분 없이 신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 수양에 좋은 일이다. 한번쯤 시간을 내 보문동에 들른다면, 그러나 합장은 부담스럽다면 가벼운 목례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비구니 스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장진혁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 보문사, 위키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76호 (19.04.3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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