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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첼로 소리 못 듣지만 진동 따라하며 배워… 이젠 합주까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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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 장애 연주자 박관찬씨]

취업 100여번 실패후 6년 전 시작… 50초 동요 한번 켜는데 두 달 걸려

활도 못보고 자기 연주 못듣지만 지금도 1시간 거리 오가며 레슨

박관찬(32)씨는 아마추어 첼로 연주자다. 하지만 자신이 연주하는 곡을 듣지 못한다. 앞도 거의 볼 수 없어 첼로 줄도, 손에 쥔 활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첼로 공연을 20여 차례 했다. 박씨는 "첼로가 내는 진동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박씨는 저시력과 고도난청(難聽)을 함께 가진 시청각 장애인이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시작됐다. 박씨와 이야기하려면 노트북에 글을 입력한 다음, 글자를 500원짜리 동전보다 크게 키워 눈앞에 가져다줘야 한다.

조선일보

지난 23일 시청각 장애인 첼리스트 박관찬(오른쪽)씨가 스승인 조명민씨의 서울 양천구 신정동 자택에서 첼로 레슨을 받고 있다. 수차례 공무원 시험에 낙방하고 100여차례 입사 시험에도 실패했던 박씨는 첼로 연주를 하면 행복하다고 한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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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5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매번 낙방했다. 장애인 채용 공고를 찾아 100건이 넘는 이력서를 냈다. 한 번도 서류전형을 통과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2012년 박씨는 우연히 첼로 연주자를 소재로 한 일본 영화 '굿바이'를 봤다. 재생과 정지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화면에 얼굴을 댄 채 자막을 읽었다. 그러다 한 장면에서 멈췄다. 영화에선 오케스트라가 해체돼 장의사 일을 하게 된 주인공 첼로 연주자가 괴로움을 잊은 듯 편안한 표정으로 첼로를 연주했다. 그 순간 첼로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지금 삶이 괴로워도 내 인생의 한 부분은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첼로열(熱)'에 빠진 그는 돈을 모아 60만원짜리 첼로를 샀다. 첼로 배우는 일은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인내심을 갖고 가르쳐 줄 선생님 구하기가 어려웠다. "청각 장애가 있어 가르쳐 주기 어렵다"며 몇 번 거절을 당한 끝에 2013년 9월 첫 선생님을 만났다.

개인 교습을 시작했지만 선생님의 말이 안 들려 일일이 노트북에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선생님이 연주하면 첼로의 진동을 느끼고, 똑같은 진동을 느낄 때까지 연습했다. 처음 배운 곡은 '고기를 잡으러'로 시작하는 '고기잡이'였다. 50초짜리 동요를 한 번에 켜는 데 두 달이 걸렸다.

레슨은 즐거웠다. 하지만 1년 만에 선생님이 외국으로 이민 가면서 교습이 중단됐다. 그 후 독학을 했다. 하루는 집 현관문에 포스트잇이 붙었다. "악기 소리가 시끄러우니 연주를 자제해달라"는 이웃의 항의였다. 박씨는 "소리가 들리지 않다 보니 첼로 연주가 이웃집에 소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고민 끝에 이웃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시청각장애가 있지만 첼로를 연주하면 너무 행복한데, 하루 한 시간만 연주하게 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휴대폰 번호를 남겼다. 편지 20여 통을 이웃집 문에 꽂아뒀다. 그날 밤 박씨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이웃들이었다. 한 이웃은 "인생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지 못해서 속상하시겠다"며 "예쁜 첼로 소리 잘 감상하겠다"고 했다.

박씨는 작년 11월부터 첼로 연주자 조명민(50)씨에게 개인 레슨을 받고 있다. 박씨가 강습을 부탁했을 때 조씨는 "배우는 게 느리겠지만 못할 이유가 없다"며 단번에 수락했다고 한다. 박씨는 매주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서울 양천구 신정동 조씨 집에 가 첼로를 배운다.

선생님 조씨는 박씨에게 새로운 과제도 냈다. 자신이 단장을 맡고 있는 '어울림 예술단'에 합류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연주하는 단체다. 박씨는 "전에는 늘 독주만 했고 누구와 화음을 맞춰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른 단원과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며 "박자 맞추기가 정말 어렵지만 꼭 합주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박씨는 지난 22일 자신의 첼로 도전기를 담은 수기 '아름다운 청년의 첼로 이야기'를 써 월간 '샘터'에서 주는 '2019 샘터상 생활수기 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달 초에는 장애 인권을 다루는 월간지에 기자로 입사했다. 박씨는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썼다면 이제는 다른 장애인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고 했다. 일을 해도 첼로는 놓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첼로가 제게 희망을 줬으니까요."

[강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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