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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납품업무" "심의관은 말단"…임종헌 재판 나온 '엘리트 판사'들 증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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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심의관들
"지시에 따랐다" "시킨 대로 했다"


조선일보

그래픽=김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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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이 (법원행정처에) 근무할 시기에 행정처 심의관 수는 몇 명이었습니까?"(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서른 두 분 안팎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지금 정확한 숫자는 헷갈립니다."(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는 법원 내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꼽히는 법원행정처 심의관 출신 법관들이 증인으로 출석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등 임 전 차장의 주된 혐의가 벌어진 '장소'가 법원행정처여서다. 판사정원법에 따라 각급 법원 판사의 정원은 3214명이다. 법원행정처에 배치되는 판사들은 이 가운데 1%를 선발하는 것이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사법연수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판사들 가운데서도 '선택받은' 이들이다.

임 전 차장의 재판에는 24일까지 여덟 명의 전·현직 법관들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가운데 4명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다. 다른 1명은 법원행정처 간부(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였고, 다른 3명은 외교부에 파견나갔던 판사거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한 이들이다.

행정처 심의관 출신 부장판사들의 증언에서는 엘리트들의 씁쓸한 단면을 찾아볼 수 있다. 임 전 차장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이 한 행위가 문제될까 민감한 부분에서는 답변을 피한다.

현직 판사 가운데 임 전 차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처음 나온 것은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였다. 지난 2일 법정에 나온 그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근무하며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검토문건' 등을 작성했다.

그는 이 문건을 작성한 경위에 대해 "임 전 차장이 구술해준 것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라고 했다. "문건의 주요 얼개와 결론, 논리적 구조나 흐름에 대해서는 임 전 차장으로부터 구술받은 내용을 될 수 있으면 그대로 기재하고 전개하려고 노력했다"는 말도 했다. 적극적인 가담자가 아니라 '방조자'로 자신의 지위를 낮춰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7일 증인으로 출석한 시진국 창원지법 부장판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에서 법원행정처 기획1·2심의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행정처 전략이나 청와대 내부 기류 관련 문건을 작성한 경위에 대해 "저런 정보들은 실장급이 아니면 심의관들은 알 수가 없는 것들"이라며 "임 전 차장이 알려주는대로 받아썼다"고 했다. 그는 "보고서에 따라 심의관들이 개인 의견을 담기 곤란한 부분은 임 전 차장이 상세히 구술을 해주거나 메모를 해줘서 넣은 것도 있다"고 했다.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심의관으로 근무했던 최우진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 사건에 대해 수시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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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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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 심의관이 '능동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증언도 있었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술해주면 제가 문서 형태로 작성해 일종의 '납품'을 하는 업무"라고도 했다. 시 부장판사도 "심의관 역할이라는 것이 제일 말단이고, 의사결정하는 간부의 지시를 따라서 하는 작업"이라며 "솔직히 가장 많이 하는 건 (법원행정처) 간부가 국회에 갈 때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 부장판사는 검찰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단순히 지시대로 이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좌기관으로 전문적 지식을 활용해 참모 역할을 하는 것이 맞느냐'고 묻자 "말씀하신 게 (대법원) 사무규칙에 대한 것 같은데,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수년 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알지 못한다"고 피해갔다. 문건을 작성하며 위법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대법원 재판을 언제 결론낼지 검토하는 취지의 문건을 작성한 정 부장판사는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 불가능했는지 지금 저로서도 사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며 "이 사건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일련의 사태에 비춰 저도 혼란스럽다"고 했다.

일부나마 책임을 인정한 이도 있다. 지난 23일 증인으로 출석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사법행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저로서는 송구스럽다"며 "(강제징용 사건을 놓고) 외교부와 비공식으로라도 의견을 나눴다는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경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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