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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매경이 만난 사람] 20년만에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받은 작가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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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최근 경기도 고양시 삼송테크노밸리 작업실에서 만난 이불 작가가 평면 신작 앞 사다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1989년 서울 동승아트센터, 스물다섯 살 작가 이불(55)은 완전히 벗은 몸으로 객석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1분 정도 지났을까. 무대에 앉아 있던 관객들이 달려가 그를 끌어내렸다. 혹시 다칠까봐 걱정돼서다. 당시 홍익대 조소과를 갓 졸업한 그는 파격적인 퍼포먼스 '낙태(Abortion)'로 미술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 삼송테크노밸리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그때는 두렵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별로 잃을 게 없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반응이 달랐다. 1시간 매달려도 내려주는 관객이 없었다. 대신 물이 가득한 세숫대야를 가져와 얼굴을 넣고 버티면서 이불의 극한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아마도 내 퍼포먼스에 공명(共鳴)해서 동조한 것 같다. 관객들이 재즈처럼 즉흥적으로 끼어들어서 함께 공연한 것이다. 내 예술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다행히 몸에 단 줄을 조정할 수 있어서 거꾸로 있다가 똑바로 서기를 반복하면서 버텼다." 1990년에는 팔다리가 여러 개 달린 핏빛 기괴한 의상을 입고 12일간 서울과 도쿄를 활보하는 퍼포먼스 '수난유감―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를 펼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가진 게 없던 20대에 몸을 던져 저항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펼친 이불은 이제 세계 미술계를 뒤엎는 스타 작가가 됐다. 지난해 런던 헤이워드와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대규모 회고전으로 극찬을 받은 데 이어 올해 3월에는 아트바젤홍콩 전시장 입구에 대형 비행선 작품을 띄워 관람객 시선을 집중시켰다. 최근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그는 다음달 '미술 올림픽'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본전시를 펼친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한 지 20년 만이다.

―다시 베니스에 가는 소감은.

▷얼마 전 작품들을 화물선에 실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엊그제 베니스에 간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됐나, 그때 내가 한 작업들이 주마등처럼 보인다. 캡슐 형태 노래방(한국관 전시), 한쪽 팔다리와 머리가 없는 불완전한 사이보그, 썩은 생선에 화려한 금속 조각과 구슬을 박은 작품 '장엄한 광채'(본전시)를 펼쳤다. 그때 굉장한 호기로 베니스에 가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게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죽을 때까지 작업을 하고 싶다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세월이 흘러 사람이 변한 만큼 작업도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초대 개인전에 '화엄'이 설치됐다가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개막 직전에 철거됐다. 이 대단한 작품은 어떻게 나왔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생명을 잃은 신체는 너무 쉽게 부패한다. 생선이 썩으면서 동물성 젤라틴이 나오고 악취가 발생한다. 그 과정이 허무해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다. 참 복잡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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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GP) 철조망을 녹여 만든 4m 높이 타워 '오바드 V', 섬유 조각 '혀의 스케일(Scale of Tongue)', 실크 벨벳 페인팅을 전시할 예정이다. 철조망으로 타워를 만든 이유는.

▷모뉴먼트(기념비)는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 모뉴먼트 역할이 끝나면 자리를 내줘야 한다. 영원하기를 기약하지만 철로 만들어도 돌로 만들어도 모든 모뉴먼트는 사라진다. GP 철조망으로 전형적인 근대 모뉴먼트인 철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그 안 공간이 텅 비어 있다. 두께 1㎝도 안 되는 철선은 얇고 가늘어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구조물에 깃발과 발광다이오드(LED)를 부착해 모스 부호와 무전에 사용하는 국제 시그널 등으로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올해는 정말 '이불의 해'인 것 같다.

▷7년 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시작해 쉬지 않고 대규모 회고전을 해왔는데, 작년부터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꾸준히 전시하니까 서구 미술계에서 충분히 내 작품을 이해하게 됐다. 영국과 독일 언론에서 방대한 내 작품을 극찬하는 리뷰가 나오면서 정점을 찍었다. 내 작업이 시각적으로 낯설기도 하면서도 상당히 장식적인데 주제를 잘 읽어내더라. 많은 분이 내 작업 언어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것 같다.

―최근 발표한 평면 작품에 사용된 흰 머리카락은 본인 것인가.

▷맞는다. 10년 정도 내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고 있다. 여행 갈 때 가위를 가지고 다닌다. 욕실 하수도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4년 모아서 꽤 많아졌다.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작품에 사용했다. 일단 재료가 될 만한 것을 모아놓는다. 벨벳 실크, 자개, 선물받는 꽃, 마당에서 피는 꽃…. 모두 유기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동물과 식물을 연결해 '사이보그'와 '몬스터' 연작을 만들었다.

―10년 전부터 가장 작은 나라를 만들어 예술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초소형 국가 프로젝트 '마이크로네이션'을 추진하고 싶다고 했는데 진척은 있나.

▷같이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운을 띄워 보면 '왜?'라는 반응이 많았다. 국가로서 기본 틀을 갖추려면 법과 여권, 국기도 만들어야 해서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상당한 시간과 공이 필요한데 최근 7년 동안 회고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일단 장기적인 목표로 남겨뒀다. 모든 작업은 할 수 있는 때가 있다. 하고 싶다고 해도 안 될 수 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 작품을 선보여 '여전사'로 불린다.

▷난 전사라고 한 적 없는데, 작품 '사이보그' 때문에 생긴 수식어다. 사실 난 싸움을 잘 못한다. 집에 처박혀 작업만 한다. 전위란 뜻은 앞에 서 있는 것, 맨 앞에서 길을 트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쓰기에는 한없이 부끄럽다. 물론 새로운 작품 언어를 만들겠다는 욕심은 있다. 최소한 매너리즘에 빠져 살지 않기를 원한다. 늘 신선감을 느끼면서 작업하고 싶다.

―20대 시절처럼 천장에 매달리는 퍼포먼스를 지금 할 수 있을까.

▷굉장한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현장 상황을 예측하고 반응하는 에너지를 모아 초한계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해 제작한 메세나대상(매일경제신문과 한국메세나협회가 매년 문화예술에 공헌한 기업과 개인에게 수여하는 상) 트로피가 인상적이었다.

▷상징적으로 디자인하고 손에 잡기 쉽게 만들었다. 근대 건축 언어로 조형물을 만들어가는 작업 중 하나였다.

―SF소설, 철학, 20세기 역사, 건축 등에서 작품 소재를 찾아왔는데 주로 어디서 영감을 받는 편인가.

▷거의 모든 것이다. 정제된 세계가 담긴 책에서 답을 자주 찾아왔는데 요즘 눈이 나빠져서 많이 못 읽는다. 지금도 하고 싶은 게 많다. 한편으로 복이 많은 것이다. 흥분도 많이 된다. 이걸로 뭘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이루기 전까지 설렌다.

―창작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다. 임플란트까지 했다고 들었다.

▷형편없는 구상이어서 괴로울 때도 있고, 작업 과정에서 잘 안 될 때도 있다. 기가 막히게 잘되다가 다음날 막히면 괴롭다.

―외국 전시가 많은데도 국내에서 사는 이유는.

▷(젊은 시절에) 유학을 갈 수 없는 여건이어서 한국에서 작업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굳이 안 나가도 여기(한국)가 더 편하다. 재료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이제 외국에 나가 스튜디오(작업실)를 열고 장비와 사람을 찾기 어렵다.

―작품 지향점은.

▷작가 초기부터 더 나은 미래,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작품에 담아왔다.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을 통해 그렇지 않은 세상을 꿈꿔왔다. 더 나은 미래는 인간의 숙명이다. 인류는 무수한 실패가 있어도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밖에 없다.

―작가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계속 작업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들고 작업실 쪽으로 간다. 끊임없이 작업이 나를 불러서 집 밖으로 잘 안 나간다. 한 달에 한 번 외출할 때도 있다. 대문 밖으로 나가는 날을 손으로 꼽는 게 더 쉽다.

■ 이불은 부친이 지어준 이름…유년기시절 불우했지만 9살때부터 작가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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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런던 헤이워드 회고전에 전시된 `Willing To Be Vulnerable-Metalized Ballon` 모습. [사진 제공 = 헤이워드]


이불은 부친이 지어준 본명이다. 한자로 새벽, 동트는 불(昢)을 쓴다.

작가는 "나이를 먹으니까 더 이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날 일(日) 변, 태양이 들어가서 좋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 본적인 경북 영주와 강원도 영월 경계에 있는 산에서 태어났다. 반체제 활동을 한 부모는 도피 중에 그를 낳았다. 공안당국의 감시와 궁핍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눈을 떴다.

"한 살부터는 서울에서 살았다. 모친이 재판을 받고 수감되기도 하고, 1년에 한 번 이사를 다녔다. 공안경찰이 찾아와 집 안과 내 공책까지 뒤졌고,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밥을 먹었다. 부모님이 5인 이상 모인 직장에 다닐 수 없어서 항상 구슬 꿰기나 가내수공업을 했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좌익사범 연좌제에서 가장 자유로운 직업이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전기류 책을 보면 확 꽂히는 것 같았다. '곤충기'를 쓴 프랑스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 이탈리아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진화론을 펼친 영국 생물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 등을 읽으면서 그중 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과학과 그림 등 모든 방면에 뛰어난 천재 다빈치처럼 되고 싶었다."

홍익대 조소과 재학 시절 그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길거리 맨홀에 들어가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성인이 된 후 하고 싶은 것은 다 실현해봤다. 연극도 해봤다. 그런데 난 좋은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알았다."

▶▶ 이불 작가는…

△1964년 경북 영주 출생 △1987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초대 개인전 △1999년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수상 △2007년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개인전 △2012년 도쿄 모리미술관 개인전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인전 △2014년 광주 비엔날레 눈 예술상 수상 △2016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수상 △2018년 런던 헤이워드 회고전 △2018~2019년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회고전 △2019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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