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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단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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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45년 8월15일, 정치 체제로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무너졌으나, 물리적 문화적 지배체제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의식적 실천과 더불어 돈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붙여 놓은 도시명과 가로명이 바뀐 것은 해방 1년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 양복점, 와타나베 과자점, 요시모토 이발관 같은 이름의 간판들이 대로변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그 뒤로도 몇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루속히 왜색 간판을 바꾸라’는 질책이 신문지면을 자주 장식했지만, 업주들은 간판 바꾸는 것을 급무로 여기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한 물건들의 이름을 바꾸는 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 이름 ‘냄비’로 바뀐 나베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일본 이름 그대로 불렸다. 가방이나 구두처럼 일본 이름인지 알지 못해 계속 쓴 것도 있지만, 사라, 와리바시, 덴뿌라, 벤또, 다꾸앙, 간쓰메, 미루꾸, 난닝구, 다라이, 가다마이처럼 일본어인 줄 알면서도 달리 대체할 말이 없어 그대로 쓴 것이 훨씬 많았다. 이런 말들을 쓰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일제강점기에 본격 형성된 산업현장에서는 더했다. 노가다, 시다, 시아게, 공구리, 구리스, 다이루 같은 ‘전문용어’들은 언론의 질책조차 받지 않았다.

1955년 8월, 내무부 치안국은 일차로 음식점들을 단속하기 위해 ‘왜식 명칭 통일안’을 작성해 각 경찰서에 하달했다. 화식(和食)은 왜정식, 덴뿌라는 튀김, 스키야키는 왜전골, 돈부리는 덮밥, 스시는 초밥, 모리소바는 모밀국수, 사시미는 생선회, 벤또는 도시락, 곤냐꾸는 왜우무, 다꾸앙은 단무지로 정했다. 대다수가 고민 끝에 만들어낸 신조어였다.

하지만 이 신조어들이 정착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1975년 10월, 새마을연수원을 수료한 기업인들로 구성된 ‘새마을동기회’ 회의 안건에 농촌 마을 단무지 공장 지원안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단무지가 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회원이 축사하기 위해 온 경제부총리에게 단무지가 뭐냐고 물었다. 대답은 ‘모르겠다’였다.

이제 단무지는 일본 이름을 완벽히 대체하는 데 성공한 물건의 대표 격이다. 동시에 식민지 시대가 남긴 물리적 문화적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한겨레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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