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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기억할 오늘] 블레이크와 폴라니의 ‘악마의 맷돌’(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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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일러스터 새뮤얼 윌슨 포레스가 그린 '앨비언 방앗간 화재'(1791). 그림에 묘사된 악마들은 물론 인간을 도와 불을 끄려는 중일 것이다.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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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한 영화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은 2,700만파운드(약 480억원)를 들인 3시간짜리 행사의 얼개를 산업혁명기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상(詩想)에서 차용했다. 중세적 이상을 지키고자 계몽의 이성에 한껏 저항한 듯 여겨지는 저 화가 겸 시인은 몽환적ㆍ예언적 메시지를 풍부한 이미지의 언어 속에 부려 넣는 데 능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니 보일이 주목한 건 블레이크가 글과 삽화를 그려 출간한 서사시 ‘밀턴’ 서문의 ‘아득한 옛날 저들의 발길은(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s)’이란 시였다.

거기서 블레이크는 아득한 옛날 예수가 거닐었다는 잉글랜드의 ‘푸르고 복된 땅(green and pleasant Land)’과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의 표적이자 산업혁명의 부정적 상징이던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을 대비시켰다. 대니 보일은 개막식 1부에서 잉글랜드의 복된 과거를, 2부에서 산업혁명으로 파괴된 자연과 훼손된 인간성을, 3부에서 저 모두를 극복한 복지 번영의 영국을 그렸다. 물론 3부는 ‘예언가’ 대니 보일의 축원이었다.

‘악마의 맷돌(방앗간)’은 블레이크가 12세이던 1769년, 그가 살던 런던 서더크 인근에 문을 연 ‘앨비언 방앗간(Albion Flour Mills)’에서 유래했다. 증기기관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가 제분 기술자와 함께 세운 그 방앗간은 엄청난 생산력으로 영세 업소들을 압도했으나 2년여 만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도산했다. 당시 그 업소는 경쟁업자들 사이에서 악마의 방앗간으로 통했다.

‘악마의 맷돌’의 상징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헝가리 출신의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4.23)였다. 그는 1944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결코 상품화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 상품이었던 적도 없는, 자연과 인간과 화폐를 상품화한 시장자유주의 메커니즘을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개인이나 신자유주의의 시장이 아닌 공생적 가치의 주체인 ‘사회’가 중심이 돼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악마의 맷돌’은, ‘앨비엇 방앗간’ 화재처럼, 모든 것을 갈고 스스로도 가루가 돼야 멈추는 것일지 모른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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