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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③]지시받아 ‘보조자’ 역할 했다는 재판 거래 ‘공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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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지난해 10월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사회원로·시민단체 주최로 열린 사법적폐 청산 시국선언 도중 한 참가자가 사법농단에 항의하는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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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문건’ 작성한 심의관들 “당시 위법하다 생각지 않아…역할 충실했을 뿐”

“증인 시진국, 나왔습니까.”

17일 오전 10시13분 서울중앙지방법원 408호 법정. 형사36부 윤종섭 재판장이 말하자 법정 경위가 10분 전 재판부가 들어왔던 법대 오른쪽의 법관 전용 출입구로 몸을 움직였다. “증인이 증인지원 절차를 신청했습니다. 이 법정에는 법관 전용 출입구 외에는 증인이 이용할 수 있는 출입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관 전용 출입구로 증인이 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증인지원 절차’란 범죄 피해자 등이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할 때 피고인이나 사건 관련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법원의 통상 절차다. 재판장은 시민들의 공정성 우려를 의식해 증인인 판사가 법관 전용 출입구로 들어오는 정황을 설명해야 했다.

시진국 판사 ‘사법농단’ 증인 출석

‘재판 거래 문건들’ 직접 작성 시인

“당시엔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아”

정다주 판사도 비슷한 내용 증언

“임 전 차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스스로를 수동적 보조자로 규정


시진국 판사(46)가 증인석에 앉았다. 시 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에 열심이던 2015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했다.

시 판사로부터 불과 1m 떨어진 피고인석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60)이 있었다. 대법원 청사에서 2년간 함께 일했던 두 사람은 법정에선 서먹한 분위기였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법정 안 공기와는 상반됐다.

재판 거래와 개입 관련 내용이 담겨 있어 큰 논란이 된 문건들을 직접 작성한 시 판사는 “피고인(임 전 차장) 지시로 문건을 작성했다”면서도 “당시에는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 2일 증인으로 나온 정다주 판사도 마찬가지였다. 임 전 차장 공소장은 2013년 9월부터 2017년 3월까지의 범행으로 구성돼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재임 시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사법농단을 벌였지만, 이는 4년여간 임 전 차장 지시를 받은 심의관들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법원행정처 심의관 “당시엔 몰랐다”

시 판사는 이날 재판에서 ‘일제 강제동원 배상 판결 보고’ ‘BH로부터의 상고법원 입법 추진동력 확보방안 검토’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전략’ 등 문건들을 임 전 차장 지시에 따라 작성했다고 인정했다. 청와대와의 각종 면담 날짜부터 대법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면담할 때 할 발언 등 구체적인 내용을 임 전 차장이 세세히 지시했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은 박 전 대통령이 자료가 1장을 넘어가면 읽지 않고, 도표를 좋아한다는 ‘깨알’ 조언도 해줬다고 했다.

문건 작성에는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준 참고자료도 반영됐다. 박 전 처장이 줬다는 자료에는 ‘사전 분위기 조성을 위해 원장님이 대통령 독대 전에 민정수석실 사전 접촉 필요’라는 대목이 있다. 문제의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사례’ 문건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청와대 면담 날짜·발언 내용부터

“박근혜 대통령 도표 좋아해”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으로부터

‘깨알 지시’ 받은 정황도 고백


그러나 문건 작성의 위법성에 대해 시 판사는 일관되게 “당시엔 위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문건에 한명숙·박지원 등 정치인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도 피고인이 지시한 것인가요?”(검사)

“네. 피고인의 지시대로 작성했고, 개별 사건을 기획조정실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피고인의 지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시 판사)

“증인은 법관을 10년 이상 했고 형사사건도 많이 해보신 분이라 피고인이 이 부분을 기재하라고 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시 판사는 이 질문에는 시인도, 부인도 안 했다.

그러면서 시 판사는 문건에 대한 ‘해석’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시 판사는 “단발적으로 지시를 받아서 썼고, 문건을 왜 쓰는 것인지 잘 파악도 안된 상태였다”며 “재판 시나리오도 어떤 방향을 정해놓은 게 아니라 재판부가 취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다 언급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의제기는 안 했느냐는 검사 질문에 그는 “대외비 형식의 내부 통용 문서이기 때문에 피고인이 받고 폐기할 수도, 활용될 수도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시 판사와 비슷한 시기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근무한 정다주 판사 증언도 비슷했다. 정 판사는 “일종의 거래 대상으로 이해하고 기재한 것은 아니었다”며 “대법원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개선됐을 때 우리가 나설 수 있는 현안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 “역사교과서·삼성 사건까지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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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사례’ 문건의 초안 버전을 재판에서 공개했다. 검찰에 따르면 2015년 11월17일 법원행정처와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의 회식 후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심의관이었던 이국현 판사가 ‘151118 기획조정실 요청 판결 리스트’라는 문건을 e메일로 시 판사에게 보냈다. 검찰은 “이 문건에는 국공립대 기성회비 반환 사건, 역사교과서 수정명령 취소 청구 기각,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정보공개청구 기각, 쌍용차 파업에 따른 노조 손배 청구 인용, 엘리엇의 삼성물산 상대 주주총회 소집 통지 결의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등이 기재돼 있다”고 했다. 시 판사가 이 판사로부터 e메일을 받은 뒤 협력사례 별첨 문건에 일부를 넣었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다만 임 전 차장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만나 문건을 전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시 판사는 “모른다”고 했다.

당시 법원행정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은 여러 군데 나온다. 검찰이 법정에서 공개한 문건이나 e메일의 상당수는 작성 시각이 늦은 밤 혹은 새벽 시간대다. 박병대 전 처장은 문건을 작성한 기획조정실 직원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법원행정처가 행정 업무를 하는 조직이다 보니 (분위기가) 경직돼 있었고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시 판사의 말이다.

“임 전 차장 지시에 따라 문건을 작성했다”는 증언이 바로 직권남용죄 성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임 전 차장은 법원행정처가 상명하복 분위기였고, 심의관들은 자신의 지시를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한 ‘보조자’였다는 점에서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직권남용죄는 하급자에게 권한·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킨 때 성립한다. 임 전 차장은 심의관들을 아무런 권한·의무가 없는 보조자로 만들어 직권남용죄를 피하려 한 것이다.

검사는 따졌다. “심의관이라는 직책이 일반 행정부처에서는 대부분 2~3급, 1급까지도 보임할 수 있는 고위공무원 아닙니까?” 시 판사는 답했다. “네. 일반 행정부처에서는 국장급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 전 차장과 시 판사는 국장급 공무원이 상관의 말을 받아적기만 하는 ‘보조자’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 선고 전 심증 유출…재판장 “판사로서는?”

시 판사는 ‘가토 다쓰야 사건 설명자료’ 문건도 임 전 차장의 메모를 받아 자신이 작성했다고 했지만 위법성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고 했다. 판결 선고로부터 최소 10일 이전에 작성된 해당 문건에는 ‘유무죄 판단과 별개로 사실 확인 없이 기사를 작성한 것에 대한 재판부의 엄중한 질책이 있을 것이다’와 같이 재판부 내심 의사를 의미하는 대목이 기재돼 있다.

문건을 작성하면서 재판 내용이 사전에 유출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는 검사 질문에 시 판사는 “단순히 개인적 의견을 넘어서 보고서로 구체화하는 게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면서도 “법리적 판단 부분을 적은 것이고, 피고인이 지레짐작이나 선제적 검토를 워낙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렇게 이해했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게 임 전 차장의

지시 때문이라고 한다고 한들

동참한 심의관들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난 16일 증인으로 나온 최우진 판사는 조금 다르게 증언했다. 2013년과 2014년 사법지원실 심의관으로 있으면서 임 전 차장 지시를 받아 일제 강제징용과 관련해 전국 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을 전수조사한 최 판사는 동료 심의관들에게 e메일을 보내면서 “(언론 등) 외부에는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는 당부 멘트를 썼다. 이에 대해 최 판사는 “재판에 관여한다든지, 재판을 취합해서 그 내용으로 전체적으로 통계한다든지 막연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재판 개입으로 비칠까 우려했다는 취지다.

재판의 막바지에 이르러 윤종섭 재판장이 시 판사에게 물었다.

“증인은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근무한 전후 지금까지 (자신이) 담당한 재판 관련해서 특정 사건의 예상 선고 결과를 선고 전에 외부에 공개한 적이 있습니까?”(윤 재판장)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시 판사)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혹시라도 소송관계인이 알게 됐을 때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판사는 자신의 판결은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어 선고 전에 공개한 적 없다면서도, 다른 판사의 판결을 선고 전에 문건에 적은 행위는 위법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설령 모든 게 임 전 차장 지시였다고 할지라도 심의관들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시 판사는 법정 경위 안내를 받아 처음에 들어왔던 법관 전용 출입구로 나갔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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