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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증명’해야만 내 양심 믿어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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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적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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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폭력행위라고 생각합니까?”(검사)

“도식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오경택)

지난 2일 서울서부지법 303호 법정. ‘여호와의 증인’ 같은 종교가 아닌 평화에 대한 신념 하나로 군입대를 거부한 오경택(31)씨 항소심 결심공판이 열렸다. 검사는 오씨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총을 들었던 특정 상황을 가정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그렇다면 5·18 당시 시민들이 집총한 것은 피고인의 양심에 반합니까, 부합합니까?” “제가 그곳에 있었다면 총을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피고인이 말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총을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항해 집총하는 것은 피고인의 양심에 반합니까?” “침략행위가 있을 때 총을 드는 것 말고도 약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5·18에 대한 답변은) 민주주의 상식에 입각했을 때 저항권 측면에서 (신념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검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질문 반복합니다. 일본 침략에 집총하는 것은 양심에 반합니까, 부합합니까?”

오씨는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직후인 지난해 7월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날 검사는 반전과 평화를 위해 오씨가 해온 사회활동이 무엇인지 물은 뒤 오씨의 양심을 ‘검증’하는 취지의 질문을 거듭 던졌고, 재판부에 1심 형량을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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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에 이어 대법원도 지난해 11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사상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자신이 믿는 종교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이들의 무죄 판단은 잇따르고 있지만, 오씨처럼 ‘자신의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선 법원과 검찰 모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내 안의 신념’을 입증할 도구는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는 자신의 종교 활동과 함께 이를 증명할 주변 신도들의 증언, 이미 병역거부로 실형을 산 가족의 이력 등을 법원에 제출하고 있다.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는 사정이 다르다. 오씨의 재판에서 검찰은 “종교와 달리 신념의 영역에서는 병역거부 결심 이유, 개인적 경험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단지 특정한 생각을 ‘강하게 믿는다’고 해서, 그 강도만으로 ‘병역을 거부할 정당한 이유'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재판부에 밝혔다. 검찰은 시민단체 활동 이력과 해당 단체의 정관, 가정환경 및 성장 과정, 사회 경험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요구했다.

병역거부자들도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 시민단체 활동 이력 등을 증거로 내고 있지만 ‘평화적 신념’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양심적 행동은 보통 급박한 상황에서 외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명확한 기준도 없이 ‘당신의 신념을 소명하라’는 부담을 떠안은 병역거부자들이 재판에 애를 먹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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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훈(29)씨도 “싹 다 긁어서 제출한다는 심정으로” 학교생활기록부와 병원 상담기록 등을 제출했지만, 검찰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신념이 있었는지 진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했다. 검사는 홍씨가 상대방을 총으로 쏘는 슈팅게임 가입 내역도 조회해보겠다고 했다.

오경택씨의 공판에는 대학 은사인 조현철 서강대 교수가 증인으로 나오기도 했다. 10여년간 오씨를 지켜본 조 교수는 “이 친구가 대학에서 했던 여러 활동을 봤을 때 병역거부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군복 입은 오경택이라는 청년을 상상하는 것보다 (병역거부한 그가) 더 낯익다”고 증언했다.

헌재와 대법원 판단이 나오기 전 평화적 신념에 따라 감옥 갈 각오로 입대를 거부해 현재까지 재판을 받는 이들은 알려진 것만 9명(예비군 거부 포함)이다. 소수이지만 이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앞으로 국방부 대체복무 심사위원회가 ‘기준’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국제기구 권고(현역 복무 기간의 1.5배)를 한참 웃도는 징벌성 대체복무제(현역의 2배인 36개월 동안 교도소 합숙 근무)가 확정된 상황이다.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심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맥락에서 검찰이 특정 상황을 가정해 오씨에게 던진 질문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막부가 천주교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십자가 밟기’(후미에)를 강요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21일 “헌재와 대법원은 병역거부를 기본권 행사라고 판단한 것인데, 여전히 검찰 등은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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