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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우린 火魔 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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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베테랑 산림청 헬기 조종사가 전한 ‘강원 산불 死鬪 현장’
강풍에 화염 기둥 속 곡예비행... 死線 수차례 넘나들어
불길 잡으려 비행한계고도(지상 20m) 넘어 5m까지 내려가
"늘 비상 대기…산불 잦을 땐 한 달에 한 번 귀가도 어려워"

"마치 거대한 뱀 같았어요. 능선을 따라 꿈틀거리던 그 시뻘건 불길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그래도 그 화마(火魔) 속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었죠."

지난 4일 밤 강원 고성에서 시작한 대형 산불은 초특급 강풍을 타고 속초·강릉·동해로 급속히 번졌다. 다음날 새벽부터 산불 진화를 위해 헬기 조종간을 잡았던 산림청 소속 김현철(52) 기장은 12시간 동안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헬기 조종사인 그조차 "조종간을 잡은 양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땀을 닦을 새도 없었다"고 할만큼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고 한다. 초속 15m 이상의 태풍급 바람이 몰아쳐 기체를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땅에서는 불기둥이 아파트 20층 높이까지 솟구쳐 아슬한 곡예비행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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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김현철(52·오른쪽) 기장과 안성철(40) 부기장이 지난 강원 대형 산불에 투입됐던 카모프 헬기 앞에 서 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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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강원 강릉산림항공관리소에서 만났을 때 김 기장과 그의 파트너 카모프(KA-32) 헬기는 산불 공중 진화 임무를 마치고 막 복귀한 터였다. "DMZ(비무장지대) 일대에서 발생한 불을 끄고 왔습니다." 그에게선 연기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그가 타고 온 카모프 헬기의 꼬리 날개에는 까맣게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산림청 소속 카모프 헬기는 한 번에 3000ℓ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주력 진화 헬기다. 이달 초 강원 산불 당시에는 총 13대가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강풍에 공중에선 흩어지는 물폭탄…비행한계고도 넘어 지상 5m까지 내려가기도
지난 4일 오후 7시 17분쯤 고성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속초를 덮쳤다. 설상가상으로 인근 강릉시 옥계면에서도 대형 산불이 나 동해시까지 확산됐다. 당시 기상청 미시령 자동관측장비에는 기록된 순간 최대 풍속은 초속 35.6m. 산꼭대기에 중형 태풍이 불어닥친 셈이다.

김 기장은 당시 바람이 거센 것을 보고 무언가 일이 커질 것을 직감했다고 했다. 김 기장은 "대형 산불은 결국 강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산림청 헬기 조종사들은 항상 기상 상태에 촉각을 기울인다"며 "특히 이맘때가 산불이 가장 많이 발생해 늘 ‘비상 시국’"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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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밤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산림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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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불길한’ 예감은 불행히도 들어맞았다. 지난 산불은 말 그대로 ‘극한 상황’이었다. 산불의 규모도 엄청났지만 바람이 거셌기 때문이다. 5일 동이 트자마자 옥계로 출동한 김 기장에 눈에 들어온 것은 산 능선 10㎞를 따라 이글거리던 불길이었다. 그의 입에선 "지옥이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매캐한 연기가 온 하늘을 뒤덮어, 헬기 조종의 ‘생명'인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았다.

더구나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탓에 진화 헬기는 강원 지역 곳곳으로 흩어졌다. 옥계에 배치된 헬기는 김 기장의 카모프를 포함해 단 두 대뿐이었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 진화 헬기 2대만 투입된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당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 기장은 강풍 속에서 헬기가 뒤집히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산악 지대에선 순간 풍속이 평지보다 초속 10m는 더 강하게 몰아친다. 산림청 헬기 조종사들 대부분이 경력 15년 이상의 베테랑이지만, 이날만큼은 헬기가 이륙하는 순간부터 착륙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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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강원 산불 진화 현장에서 산림청 소속 카모프 진화 헬기가 물을 쏟고 있다. /산림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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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강풍 때문에 진화 작업에 애를 먹었다.

"헬기 진화는 불길이 가장 센 ‘화두(火頭)’에 물폭탄을 투하해 산불 확산을 막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강한 바람 탓에 물폭탄이 불길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흩어지더라고요."

결국 김 기장은 비행한계고도인 지상 20m 아래까지 내려갔다. 고도 유지 장치에서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지만 지상 5m 높이까지 바짝 붙어 불길 바로 위에 물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오후 늦게 바람까지 잦아들면서 겨우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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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헬기를 몰아온 30년 경력의 베테랑 김현철(52) 기장.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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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線 위 헬기 조종사들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일할 뿐"
산림청 헬기 조종사들은 스스로를 ‘불나방’이라고 부른다.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이들을 뒤로 하고 자신은 불속에 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산불에도 ‘골든타임’이 있어요. 30~40분 내에 현장에 날아가서, 물을 담고 진화까지 해야 합니다. 당연히 불길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죠."

하지만 화재 현장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 대표적인 게 고압선이다. 김 기장은 헬기 진화 중 가장 위험했던 순간을 "눈앞에서 갑자기 고압선을 발견했을 때"라고 했다. 산악 곳곳에 늘어져 있는 고압선이 헬기 조종사에게는 폭약을 터뜨리는 ‘도화선’(導火線) 같은 느낌이다.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헬기 조종사라도 진화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의 고압선을 놓치기 쉽다. 아차하는 순간 고압선에 걸리고 만다. 특히 시꺼먼 연기 속에 숨어있는 고압선은 더더욱 발견하기 힘들다. 실제 김 기장은 동료 2명을 고압선 충돌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하루에도 수 차례 사선을 넘나드는 헬기 조종사라 해도 동료를 잃는 것은 익숙해지기 어렵다.

"저뿐 아니라 여기 조종사들 모두 항상 습관처럼 가족한테 ‘나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합니다. 언제 우리가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그만큼 헬기 조종은 위험합니다. 사명감과 자부심, 그거 없으면 이 일 하기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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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강원 산불 진화 현장에서 산림청 소속 카모프 진화 헬기가 물을 쏟고 있다. /산림청 제공

한 번 산불이 크게 나면 일출부터 일몰까지 김 기장은 땅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다. 2시간 30분마다 급유를 위해 착륙하는 10분을 제외하곤 공중에서 화마(火魔)와 다툰다. 매일 1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내리 진화 작업에 투입된다. 그는 산불이 잦았던 지난해 11월부터 이달까지 5개월 동안 집에 들어간 횟수는 채 5번이 안된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예비 인력도 부족하지만 언제 어디서 갑작스럽게 산불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을 제외하곤 진화 헬기 조종사 대부분이 ‘비상 대기' 상태이기 때문이다.

김 기장은 소방대원뿐만 아니라 산림청 대원도 강원 산불 진화에서 고생했다는 점을 국민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어떤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국민 여러분이 우리의 노고를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거 하나면 됩니다."


[강릉=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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