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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420환 하던 계란 한꾸러미 1000환까지…" 화폐개혁 당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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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벼락같은" 10대 1 화폐개혁 단행…대혼란

천문학적 비용·금융권 전반 개혁 불가피

정치권 중심 리디노미네이션 군불때기

아시아경제

[이미지출처=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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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윤신원 기자] "벼락같은 「화폐개혁」 발표로 10일 서울 거리는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허둥지둥하는 시민들로 들끓었다. 이날 시내는 각시장마다 철시상태에 들어가 물건사려는 사람들만 법석대는가하면 개봉극장이나 유흥장은 거의 문을 닫아버렸는데 이와는 반대로 각동회와 은행앞은 구권을 신고하려는 사람 새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이른아침부터 줄지어 늘어서고 있다." (동아일보 1962년 6월 11일 기사 <잃어버린 휴일> 중)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이른바 '화폐개혁'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과거 있었던 두 차례의 화폐개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장 최근있었던 화폐개혁은 1962년 6월 10일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재정적자가 쌓이고 물가가 치솟으면서 경기가 침체된 가운데 숨어 있는 퇴장자금을 양성화한다는 목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투자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긴급통화조치법에 따라 화폐 액면을 10분의 1로 조정하고 지금의 '원화'를 발행했다. 하지만 신권 교환 방법이나 교통수단 요금을 어떤 화폐로 사용할지 등 구체적인 준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화 유통을 금지했고 전국민은 대혼란을 겪어야 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철시한 10일 상오 더러 문을 연 상점에서는 평소의 2, 3배로 물건값을 올려받고 있다. 남대문 시장의 경우 문을 연 어떤 고깃간에서는 쇠고기 한근에 4천환씩 팔고 있으며 계란 한꾸러미에 4백2십환하던 것을 1천환씩, 1백환씩받던 「사이다」 한병에 5백씩 막올려 팔고 있었다."(같은 기사)


이런 국민들의 동요에 당초 목적이었던 퇴장자금 회수율도 낮게 이뤄지면서 불안감만 증폭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앞서 진행된 1차 리디노미네이션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해였다. 전쟁으로 경제는 궁핍했고,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압력은 커지고 통화의 대외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화폐 액면금액을 100대 1로 절하하고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해외 사례는 어떨까. 1960대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30여 개 나라가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일부는 성공했고, 일부는 실패했다. 성공적인 사례는 터키다. 2005년 당시 터키 정부는 100만리라를 1신(新)리라로 절하했는데, 연간 50%에 달하던 물가 상승률이 한 자릿수로 낮아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반대로 베네수엘라는 볼리바르 액면가를 2008년 1000대1로, 지난해에는 10만대 1까지 낮췄지만 연 200만%에 달하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자체에 대한 불신만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단위를 변경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컨대 1000원을 10원 혹은 1원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수 년 전부터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돼왔고, 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경제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난 2004년부터 3차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반세기 전의 낡은 화폐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은은 구체적인 리디노미네이션 실행 방안까지 마련했으나 물가불안 등을 우려한 정부 부처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렇다면 리디노미네이션은 왜 필요한 걸까. 사실 일반 국민들은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1만원, 10만원 단위로 돈을 쓰는 일상생활에서는 큰 불편함이 없기 때문. 하지만 기업들의 대규모 거래나 국가 통계 수치를 표기할 때는 어떤가. 단위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일례로 지난 2010년부터 우리나라 전체 금융자산은 10,000,000,000,000,000, 즉 1경을 넘어섰다. 0이 16개가 붙는다.


또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달러가 1000원이 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해 만약 원·달러 환율이 1.1원 수준으로 바뀌면 한국 화폐의 대외 위상도 높아질 수 있다. 현재 1달러 환율이 1000 안팎인 화폐 보유국들은 르완다, 레바논 등 우리나라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의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월급이 200만원에서 2000원으로 바뀌고, 주택가격이 10억원에서 10만원으로 바뀐다면 어떨까. 국민들의 실생활에 혼란을 야기하고, 물가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또 현재 1000원 미만 단위의 가격표시는 편의상 반올림될 가능성이 높다. 즉 900원짜리 물건은 0.9원보다는 1원으로 표기될 것이며 결국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실효성도 불투명하다. 한국 화폐의 대외 위상이 제고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단순히 기대감에 불과하다. 달러환율이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들 중에서도 한국 화폐의 위상보다 낮은 나라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또 리디노미네이션은 비용이 가장 큰 문제로 거론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신권 화폐 제조, 금융권의 현금자동입출금(ATM)기나 각종 자동판매기 교체, 뿐만 아니라 전산시스템과 회계 컴퓨터 시스템 등 금융권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


한편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검토한 바도,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일축했으나 일각에서는 시행 적기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화폐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윤신원 기자 i_dentit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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