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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날엔…] 한국 정당史 '유일무이', 200석 넘는 정당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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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1990년 '3당 합당' 합의 당시 221석…유권자 표심 왜곡 논란 '민심의 역류', 정권교체의 불씨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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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내년 제21대 총선과 관련한 ‘240석’ 발언으로 야당에 뭇매를 맞았다. 원외 지역위원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덕담 차원으로 건넨 말이라고 하지만 ‘오만한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


한국 정치에서 ‘총선 200석’은 어떤 정당도 달성하지 못했던 꿈의 성적표다. 특정 정당으로 여론의 흐름이 쏠릴 때마다 200석 돌파 가능성이 주목받았지만 실제로는 과반 의석을 넘는 수준에서 의석이 결정됐다. 여론의 견제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200석을 넘는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새 정당은 온건 중도 민주세력이 참여하는 국민정당으로써….”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날을 꼽는다면 1990년 1월22일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정치 역사상 다시 나올 수 없는, 아니 다시 나와서는 안 되는 합의가 이뤄진 날이기 때문이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위해 손을 잡았다. 새로 출범하는 정당 이름은 민주자유당. 현직 대통령이 민자당 총재를 맡고 야당 총재들이 공동 대표를 맡는 초대형 정당의 출범은 국회 생태계를 교란했다.


여당을 견제하라고 야당에 표를 몰아줬던 유권자들은 하룻밤 만에 바뀐 국회 상황을 지켜보며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권력을 향한 무한 욕망, 그것은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거대했던 공룡정당의 출범을 가능하게 했던 토대였다.


3당 합당 선언 당시 원내 의석은 민정당 127석, 통일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 등 221석에 달했다.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들이 여당과 손을 잡으면서 의석 구도는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민자당은 200석을 훌쩍 넘겨서 단독으로 개헌이 가능한 정당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법률을 바꾸고 헌법도 바꿀 수 있는 정당이 된 셈이다. 1990년 민자당 창당을 계기로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폐해가 가속화됐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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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호남 포위론’이다. 평민당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만 지지하는 정당으로 축소시키는 전략이다. 사실 민자당 창당 과정에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 쪽에도 합당 제의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총재는 합당을 거부했다.


3당 합당은 정치권 내에서도 반발을 일으켰다. 주로 통일민주당 쪽에서 이탈자가 나왔다.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의원은 민자당 참여를 거부했다. 이기택 의원도 불참했다. 공화당 소속의 김현 의원도 민자당 합류를 거부했다. 합당 거부파 의원들은 소신을 지킨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민자당 탄생의 직접적인 배경은 여소야대 정국이다.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아니었다. 민심도 심상치 않았다. 민정당은 난국 타개의 방법으로 야당을 흡수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했다.


민자당 탄생의 또 다른 배경으로는 내각제 개헌에 대한 공감대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물이었던 대통령 직선제가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번졌다. 3당 합당은 정치 야합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는 얘기다.


1992년 4월 제14대 총선은 민자당 심판 선거였다. 민자당의 위상이나 조직력을 고려할 때 경쟁 후보들을 압도하는 게 당연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149석을 차지했다. 221석의 3당 합당 당시 의석 규모와 비교한다면 참패와 다름없는 결과였다.


반면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민주당은 97석을 얻으며 선전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끄는 통일국민당은 31석을 차지했다.


서울의 선거 결과는 민심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서울에 배정된 44석 중 민자당은 16석에 그쳤고 민주당은 25석을 얻었다. 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10석, 통일민주당 10석, 신민주공화당 3석 등 23석을 얻었지만 3당 합당 이후에는 7석이나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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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너머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다./윤동주 기자 doso7@


민자당은 1992년 김영삼 대통령 후보 당선으로 다시 탄력을 받을 것처럼 보였지만 민심의 심판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권력을 매개로 한 ‘적과의 동침’, 국회라는 정부의 견제장치를 사실상 무력화한 정치합의에 민심은 등을 돌렸다.


1995년 6월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결정타로 다가왔다. 민자당은 15개 광역단체장 선거 중 5개 지역 승리에 그쳤다. 서울에서는 민주당 조순 후보가 42.35%를 얻으며 20.67%를 얻는 데 그친 민자당 정원식 후보를 여유 있게 눌렀다. 민자당은 서울 25개 구청장 선거 중 강남구, 서초구 등 단 2곳에서 승리하고 23곳을 민주당에 내줬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민자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5년 12월 민자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신한국당이 출범했기 때문이다.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은 바꿨지만 민심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신한국당이라는 이름도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계개편이 일어나면서 당명은 다시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정권교체의 아픔을 겪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1997년 대선의 당선자로 발표했다.


한국 정치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순간이다.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기울었던 정치 운동장을 바로 잡은 존재는 국민이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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