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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재난 다큐 같은 좀비 대재앙 생존기 -미국 드라마 ’블랙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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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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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는다. 감염자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군의 통제에 따라 대피소로 이동한다. 가족과 함께 피신하던 로즈(제이미 킹)는 부상을 입은 남편이 검문을 통과하지 못하자 어린 딸을 먼저 피난시킨다. 하지만 남편은 이내 괴물로 변해 로즈를 공격하고, 그녀는 낙오된 군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다. 죽은 자는 곧바로 좀비가 되고 산 자들은 연료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약탈자가 되는 아비규환의 세상. 로즈는 소수의 생존자 그룹과 함께 최후의 피난처로 향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블랙 썸머>(Black Summer)는 좀비 대재앙이 발생해 전 인류의 95%가 사망하는 종말의 비극을 그린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방영된 좀비 아포칼립스 <제트네이션>(Z Nation)의 스핀오프(파생물) 시리즈로, <제트네이션>에서 ‘모든 것이 지옥으로 떨어진 여름’으로 설명됐던 절멸의 계절을 배경으로 한다. 말하자면 프리퀄에 해당하지만, 좀비 대재앙의 원인이나 문명의 붕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시청자들은 느닷없는 재앙과 마주한 극중 인물들처럼 어떤 안내문도 없이 종말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

흡사 재난이나 내전 지역의 생존 다큐멘터리처럼 보일 만큼 현실적인 날것의 공포를 보여준다는 데에 기존 좀비물과 <블랙 썸머>의 차별점이 있다. 실제로 <블랙 썸머>의 제작진은 ‘난민 위기’에 대한 은유를 작품 곳곳에 배치했다. 대피소로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존자들은 난민처럼 묘사되고, 그들을 가로막는 검문소와 군인들의 모습에서는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미국의 현주소가 연상된다. 폭격으로 망가진 도시에서 벌이는 최후의 총격전은 내전 지역의 시가전처럼 그려진다.

<블랙 썸머>의 독특한 형식도 이런 현실적 공포를 뒷받침한다. 8부작인 이 작품의 각 에피소드는 대여섯개의 짧은 챕터로 구성된다. 서사는 파편적이고 인물의 시점도 계속 바뀐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냥터와도 같은 곳에서 일관된 서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듯 이 작품은 쉴 새 없이 도망가고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세계에 최적화된 형식을 보여준다. 좀비로 변해 집 주변을 서성이는 아내를 죽이지 못해 망설이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워킹데드> 시리즈의 휴머니즘에 대한 성찰이나 극적 서사는 여기에 들어설 틈이 없다.

좀비 아포칼립스에 흔히 등장하는 주인공 유형, 즉 백인 남성 액션 히어로도 없다. 오히려 눈에 띄는 인물은 영어 한마디 못하고 약탈자들의 손쉬운 타깃이 되면서도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주는 한국인 여성 캐릭터 우경선(크리스틴 리), 본명도 정체도 의심스러운 흑인 남성 스피어스(저스틴 추 케리) 같은 인물들이다. 최근 조선시대 계급사회에 대한 정치적 은유로 눈길을 끈 김은희 작가의 <킹덤>에 이어 <블랙 썸머> 역시 점점 액션 블록버스터화 되어가는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에 신선한 시선으로 활력을 주는 작품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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