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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아빠, 꼭 남자가 돈 벌어야돼? 난 그냥 '취가'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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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20대 아들과 50대 아버지… 요즘 이렇게나 다릅니다

강원도 한 대학에 다니는 이모(23)씨는 사업하는 여성을 만나 '취가'하는 게 꿈이다. '취가'는 '취업 대신 장가간다'는 뜻의 신조어다. 이씨는 "여자들도 '취집(취업 대신 시집)'이란 말을 하지 않느냐"며 "아내가 돈을 잘 번다면 굳이 나까지 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남자의 인생'에 대해 아버지 세대와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진 아들 세대가 출현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1월 전국 만 19∼59세 남성 3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20대 남성들이 '일' '결혼' '가족' '상사의 권위' 등 삶의 많은 국면에서 아버지 세대인 50대와 동떨어진 대답을 했다.

이들은 '남자라면 강해야 한다'거나 '권위에 복종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또래는 여성보다 이익을 누린 게 없으니 의무도 똑같이 져야 한다'는 생각도 뚜렷했다.

◇셔터맨이 어때서?

연구원은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전통적 남성 역할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세대별로 물었다. 20대와 50대가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게 '가족의 생계는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문항이었다. 50대 남성은 10명 중 7명(70.8%)이 동의했지만, 20대는 10명 중 3명(33.1%)만 동의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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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위기 후 직장인이 대거 실직하면서 '셔터맨'이란 말이 등장했다. 뚜렷한 직업 없이 아내가 하는 가게 문을 열고 닫으며 산다는 뜻이다. 50대는 농담 삼아 "셔터맨이 부럽다"고 할지언정 마음속으론 "그런 인생은 남자로서 부끄럽다"고 여기는 이가 많았다. 중소기업 사장 배모(56)씨가 "셔터맨이 된 우리 세대 친구들은 '밥벌이를 못 한다'고 생각해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20대는 달랐다. 취업준비생 윤모(29)씨는 "친구들끼리 '취가하고 싶다' '셔터맨 하고 싶다' '전문직 아내 만나 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고 했다.

◇남자라고 왜 강해야 하나

30대 이상 세대는 '남자는 무엇보다 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말에 대체로 동의했다. 20대만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34.1%)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39.9%)이 더 많았다. '상관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문항에 대해 50대는 과반이 '동의'(20.8%) 혹은 '보통'(44.2%)이라고 답했지만, 20대는 일부만 '동의'(15.0%) 혹은 '보통'(28.2%)이라고 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을 20대는 '또 다른 억압'으로 받아들였다. 이번 조사에서 '남자는 힘들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20대는 열 명에 두 명(18.2%)이 채 안 됐다. 대학생 허모(24)씨는 "'남자가 계집애처럼 울면 안 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는데,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했다.

◇소중한 건 가족과 자기 시간

50대는 고도성장 시대에 '아버지보다 잘되겠다'는 각오로 청년기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지금 20대는 '왜 꼭 아버지보다 잘돼야 하나?'부터 묻는다"고 했다. 서울 명문 공대에 다니는 하상우(25·가명)씨는 의대 교수 아버지가 수술 때문에 새벽에 들어와 새벽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하씨는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 의대 대신 공대에 갔다"고 했다.

20대 남성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20대 거의 절반(47.2%)이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면 이직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50대는 네 명에 한 명(27.2%)만 이 말에 동의했다. 마경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실장은 "지금 20대는 더 이상 '일 중심의 남성적인 삶'을 살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평등' 개념이 달라졌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이 한편으론 특권을 당연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여성을 안쓰럽게 여겼다. 20대는 달랐다.

이번 조사에서 50대 남성은 세 명 중 한 명(29.9%)이 '여성에게 야근·숙직 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20대는 열 명 중 한 명(9.9%)만 그에 동의했다. 또 50대는 세 명에 한 명(35.9%)이 '힘들고 위험한 일은 남성이 해야 한다'고 했지만, 20대는 다섯 명에 한 명(20.6%)만 동의했다.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50대 남성이 젊었을 땐 일하는 여성이 적어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지만, 지금 20대 남성에게 또래 여성은 '배려 대상'이 아닌 '경쟁자'"라고 했다.

[남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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