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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전후 영국 초라한 자화상 담은 첩보물 ‘클로스 투 디 에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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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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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독일의 한 남자와 어린 딸이 한밤중에 납치돼 영국으로 끌려온다. 남자의 이름은 디터 쾰러(오거스트 딜), 고속엔진 기술을 다루는 과학자였다. 제대를 6주 앞둔 정보국 소속 칼럼 퍼거슨(짐 스터지스) 대위는 상사로부터 쾰러가 영국의 초고속 제트기 개발을 돕도록 설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칼럼은 디터를 연금한 코닝턴 호텔에 비밀 사무소를 설치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전략을 짠다. 하지만 아직 어린 디터의 딸 로테(루시 워드)가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해 힘겨워하고, 전범조사부의 캐시 그리피스(피비 폭스)가 호텔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면서, 칼럼의 임무는 난항을 겪게 된다.

2016년 <비비시>에서 방영된 드라마 <클로스 투 디 에너미>(Close to the Enemy)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국운이 달린 긴급 임무를 수행하는 정보국 대위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단 표방하는 장르는 첩보 스릴러다. 코닝턴 호텔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주인공 칼럼을 포함해 비밀스러운 사연을 감춘 다양한 인물이 모여들고, 제각각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감시하고 염탐한다. 첨단 장비도, 박진감 넘치는 액션도 없지만 전후의 혼돈과 냉전의 불안에 빠진 영국의 사회상 자체가 이야기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역사극으로 볼 때 더 흥미로워진다. 국제 헤게모니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어가는 냉전 시대에 대영제국 시절의 영광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쓰던 영국의 초라한 자화상이 그 안에 있다. 미국, 러시아와의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독일의 과학자, 기술자는 물론이고 사업가들까지 납치한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냉철한 자기반성이다. 애국심 투철한 전쟁 영웅 출신의 칼럼 퍼거슨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납치당한 과학자 부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지만, 속으로는 이 일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참전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칼럼의 동생 빅터(프레디 하이모어)는 겉으로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칼럼의 내면이 실은 자신보다 더한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간파한다.

국내 시청자들이 특히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은 영국 정부가 국익을 위해 전범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신분 세탁까지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대목이다. 한편에서는 전쟁범죄 청산을 위해 전범조사부를 운영하면서 또다른 편에서는 전쟁범죄자와 비밀리에 공모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쟁 당시 군 동료들을 고문하고 동족들을 학살한 범죄자들이, 전쟁이 끝나자 그 효용 가치 때문에 영국 정부의 은밀한 수호를 받는 모습을 목격한 전범조사부 캐시 그리피스의 분노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친일파들이 다 청산되지 못하고 해방 이후 관료로 변신해 호의호식한 역사를 지닌 우리의 분노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쏟아져나올 일제강점기 역사극들은 어떤 문제의식을 담아낼지 궁금해진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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