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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성년들의 ‘웃픈 지리멸렬’, 미성년과 다를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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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미성년>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예상 뒤엎으며 전개되는 이야기

웃음과 서글픔 동시에 자아내

철없는 ‘어른애’, 어른스러운 ‘애어른’

실감나게 보여주는 섬세한 연기들

기발한 시나리오에 덤덤한 연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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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너 때문에 우리 집은 이제 지옥이다!”

<미성년>이 간판처럼 노출시키고 있는 위 두 대사에 ‘미성년’이라는 제목이 결합되면, 거의 발포비타민 거품 나듯 자동적으로 그려지는 상황이 있다. 미성년자의 임신, 그리고 그를 둘러싼 부모들 간의 전쟁 등등. 거기에 그다지 화사한 표정이 아닌 2명의 여성 고교생과 2명의 중년 여성, 그리고 1명의 중년 남성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는 포스터 이미지까지 합세하면, 최소한 영화의 80퍼센트가량은 이미 본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영화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을 경우 열이면 아홉은 품게 될 이러한 선입견은 다분히 의도된 색채가 강한데,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은 영화 시작 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짐작이 대부분(또는 전부) 틀렸음을 알게 된다. 우선, ‘배가 불러오는’ 사람은 여고생 중 한명이 아니라 중년 여성 중 한명이다. 그리고 그 ‘배가 불러오는’ 중년 여성은 중년 남성의 아내가 아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은 지옥이다”는 중년 남성의 아내가 한 대사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너’는 중년 남성도 아니고, 또한 ‘배가 불러오는’ 중년 여성도 아니다.

대체 뭔 상황인데?

그럼 대체 뭔 상황인데? 이런 의문을 품으시는 단계가 아마도 이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단계가 아닐까 싶은데, 뭐, 사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어디서든 손쉽게 접할 수 있는지라 딱히 스포일러 경고를 해드리지 않고 계속하자면, 위 두 대사는 두 여고생(한명은 중년 부부의 딸, 또 한명은 싱글맘의 딸)이 서로에게 던지는 대사다.

요컨대 상황은 이렇다. 같은 학교, 같은 나이, 외동딸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주리’(부부의 딸, 김혜준)와 ‘윤아’(싱글맘의 딸, 박세진)는, 주리의 아빠(‘대원’, 김윤석)와 윤아의 엄마(‘미희’, 김소진)가 바람을 피워 아이까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둘은 학교 옥상에서 만나 상당히 격한 대책회의를 하는데 그 와중에 윤아가 돌연 주리의 엄마(‘영주’, 염정아)에게 자신의 엄마(!)의 바람 및 임신 사실을 냅다 폭로해 버린다.

그런데 <미성년> 소우주의 빅뱅이라 할 이 ‘폭로’ 장면에는 긴장감 및 폭발력 극대화를 위한 사전 밑작업이라든지, 폭로 장면의 극단적 클로즈업이라든지, 폭로 직후에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된 상대방(이 경우 주리의 엄마)의 반응 보여주기 등등 일반적으로 폭로라 불리는 상황에 흔히 수반되는 장치들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그저 치고받기 도중에 한명에게 걸려온 전화를, 다른 한명이 기습적으로 탈취하여 신속하게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상황으로 처리될 뿐이다. 하다못해 그 폭로를 들은 주리 엄마의 표정이나 최소한의 반응, 예컨대 “뭐라고? 다시 말해봐. 지금 뭐라고 했어?” 같은 식의 반응도 없다.

그런 식이다. <미성년>은 이 폭로 뒤에 이어지는 극적 변곡점이라 할 만한 상황들, 예를 들어 주리의 엄마가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윤아의 엄마)를 찾아가고, 그 결과 어떤 ‘사고’가 터지는 상황에서도 ‘여러분 주목’이라는 식의 빨간 밑줄을 긋지 않는 무덤덤한 어조를 유지한다.

뭐, 모든 배우 겸 감독들이 존 캐서베티스처럼 단호한 연기와 연기자 최우선주의를 견지하는 것은 아니겠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만, 적어도 <미성년>에서만큼은 이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는 김윤석의 배우로서의 감각이 느껴진다. 배우들의 연기를 가장 앞에 두는 이러한 연출 방식은 최소한 한 사건을 둘러싼 다섯 사람들의 입장, 행동, 심리, 감정이 얽히고설키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상당히 유효하다. 배우들의 고루 좋은 연기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또한 이러한 연출은 이 영화 특유의 냉온탕 공존형 유머 감각에도 잘 조응한다. <미성년>의 서글프면서도 웃긴, 웃기면서도 서글픈 유머는 일차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 관심사인 성년형(形) 미성년자들(즉, 나이는 중년이되 행동은 미성년자인 어른들)의 각종 미성년 행각으로부터 나온다. 이 모든 평지풍파의 근본인 주리의 아빠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딸 주리에게 “아빠? 인기? 있지. 으흐허허” 운운하던 중 등짝을 강타당한다.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한 싱글맘은 미성년 딸에게 엄마의 인생을 가엾게 여겨주지 않는다며 항의하다 소파에 몸 던지며 운다. 남편의 애를 임신한 여자의 딸을 만난 엄마는 “흔들리면 안 돼”라고 그 딸을 위로하다가 “아줌마 딸 걱정이나 하세요”라는 대답을 돌려받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각자 ‘내 안의 초딩, 중딩, 고딩’을 끌어안은 채 어쨌든 성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른들의 서글픈 지리멸렬은, 그것을 보고 웃고 있는 우리들과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은 닮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냥 웃기만 할 수도, 또 마냥 한심해할 수만도 없는데, 한편으로 이 영화의 두 진짜 미성년들은 미성년스러운 성년과 인접한 미성년이 흔히 그러하듯이 종종 성년보다 더 성년 같은 면모를 보인다.

강한 울림 일으키는 염정아 대사

그렇게 <미성년>은 코믹함과 슬픔,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지워가며 뒤섞는데, 그 미묘한 지점을 리얼리티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잡아내는 것은 첫째 기발하면서도 스스로의 기발함에 흥분하지 않는 시나리오, 둘째 배우들의 고루 탁월한 연기, 셋째 그 생생한 원재료에 뭔가 양념을 가미하고자 하는(특히나 ‘코믹 장면’, ‘슬픈 장면’, ‘행복한 장면’ 같은 자막 삽입에 준하는 감정 설명과 지시형 음악들) 욕구를 참아낸 연출이겠다.

그중 발군인 것은, 언뜻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대사들이다. 특히 다섯명의 성년과 미성년 중 염정아가 연기하는 주리의 아내 영주의 대사들은 그중에서도 인상적이다.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의 밥을 거의 강박적으로 챙기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모두의 엄마의 모습인데,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자신의 존재를 위태롭게 세워가며 살아 넘기고 있는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에서 흘리는 한마디,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 나쁜 인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는 눈물압출형 오케스트라 음악 열흘분을 훌쩍 상회하는 강한 울림을 남긴다. 또한 그녀가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밥을 챙겨주던 중 마지막으로 흘리는 대사는, 아마도 근래 필자가 접한 대사들 중 ‘외로움’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가장 근접하는 대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미성년>의 매력은, 이 영화가 어른들을 마냥 어른애로만, 또 미성년들을 마냥 애어른으로만 묘사하며 한쪽을 마냥 힐난하고 한쪽을 추어주는 식의 이분법을 택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다섯 인물 중 유일한 ‘수컷’이면서 마지막까지 철없고 찌질한 주리의 아빠를 제외한다면, 영화는 부족하고 모자라고 한심하고 때론 난폭해지기까지 하는 자신의 인물들을 섣부른 동정이나 쥐어짜는 눈물 없이 가만히 지켜본다. 인물들에 대한 채점 기준표나 미리 정한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은 그 시선에 섞여 있지 않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따뜻함을 느낀다면 그 온기는 바로 ‘지켜봐주기’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꽤 과감했다만 아무튼 <미성년>에서 후련한 해결책이나 장대한 메시지 같은 것을 기대하신다면 아마도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실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 성년들도 미성년들도 여전히 미성년인 채로 남는다. 미성년이 조금 성년에 가까워진 정도뿐이다.

하지만 그 대단한 것 없음이 마음을 흔든다. 거대한 현수교를 서서히 출렁거리게 하고는 끝내 무너뜨려버린 그 유명한 산들바람처럼 말이다. 그렇게 흔들린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좌표가 조금은 바뀐 것 같기도 하다. 그 좌표이동에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는 잘 몰라도.

함부로 편들지 않고, 지레 비난하지 않고, 손쉽게 구제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하여 영화는 매뉴얼이 아닌 거울이 된다. ‘예술’이라는 거하고 공허해진 단어를 쓰지 않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들어낸 픽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영화평론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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