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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과학을읽다]'애너그램'의 유희와 기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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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영화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애너그램.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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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영화 '양들의 침묵'을 좋아하는 골수 팬들이 많습니다. 1991년에 나왔던 이 영화가 아직도 영화팬들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영화 상영시간 100분 동안 고작 19분 정도 출연해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앤서니 홉킨스(한니발 렉터 역)의 명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시나리오(각본)을 빼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 영화의 골수팬들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하나로 두 주연배우였던 앤서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클라리스 스털링 역)의 '애너그램(Anagram)' 유희를 손꼽습니다.


렉터 박사가 FBI 연수생인 스털링에게 "내 환자 중 헤스터 모펫(Hester Mofet)을 찾아보게"라고 힌트를 줍니다. 스털링은 'Hester Mofet'이 'The rest of me(나의 나머지)'의 애너그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하지요.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이나 조연들이 애너그램으로 숨겨진 뜻을 해석하는 장면이 독자나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작품의 전개가 빨라지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고, 독자나 관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하는 꼭 필요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애너그램은 단어나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문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일종의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어나 문장의 철자를 재조합해 새로운 단어나 문장을 만들어내야 하는 만큼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지식, 뛰어난 두뇌가 뒷받침 돼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주 오래 전부터 상류층이나 지식층의 유희나 그들만의 암호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애너그램을 풀어냄으로써 스스로 언어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가졌음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고대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중세 유럽인들은 라틴어로 즐겼습니다. 프랑스 궁정에서는 왕을 위해 애너그램을 하는 사람을 별도로 고용했을 정도로 애너그램은 게임으로, 지적 유희로 상류층을 사로 잡습니다.


애너그램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관련 언어의 어휘력은 물론 단어를 이리저리 짜맞추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 있는 끈기도 필요합니다. 또 상대방과 애너그램을 주고받으면서 암호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는 서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거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우수한 두뇌를 가져야만 가능합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애너그램을 풀어내는 등장인물이 대부분 천재이거나 천재와 비견되는 인물인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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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빈치코드'에서 애너그램으로 단서를 남겨놓고 숨진 피살자의 모습.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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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출시된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에도 애너그램이 등장합니다. 피살자가 죽으면서 남긴 "Oh, dracon ian devil!(오, 드라코같은 악마여!), Oh, lame saint!(오, 불구의 성인이여)"를 주인공 리처드 랭던(톰 행크스 분) 박사는 애너그램으로 "Leonardo da Vinci(레오나르도 다빈치), The Mona Lisa(모나리자)"라고 풀어냅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도 주인공 해리포터 앞에서 볼드모트의 후계자가 볼드모트의 이름을 애너그램으로 밝혀내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TOM MARVOLO RIDDLE'(톰 마볼로 리들)'이란 자신의 이름을 공중에 쓴 뒤 마법으로 'I AM LORD VORDEMORT(나는 볼드모트 경이다)'라는 문장으로 애너그램화 시킵니다.


'양들의 침묵'이나 '다빈치코드' 등 지적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풀어내는 애너그램은 일반적인 상황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애너그램은 언어 유희지만 학문적으로는 수학이나 기호학에 더 가깝습니다. 베스트셀러인 '장미의 이름'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유명한 기호학자였습니다.


작품 속에 애너그램을 녹이기 위해서는 움베르토 에코나 댄 브라운처럼 천재적 두뇌가 없이는 안되는 걸까요? 특별한 부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언어적 유희. 이 놀이를 그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지 않은 대중들이 어려운 애너그램에 더욱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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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톰 마볼로 리들'이라는 문장을 공중에 쓰고 있는 볼드모트의 후계자.[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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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문자나 키릴문자처럼 읽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알파벳을 사용하는 문자는 애너그램으로 조합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동양의 한자나 하나의 낱소리들이 조합돼 한 소리가 되는 한글의 경우는 쉽지가 않습니다. 영어권 소설에는 애너그램이 자주 나타나지만 동양권의 소설 등에는 드물게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겠지요.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파자(破字)'가 애너그램을 대신한 지식층의 유희였습니다. 한자의 획과 구성요소를 쪼개거나 합쳐서 의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계기가 된 '走肖爲王(주초위왕)'이 대표적입니다. 조선 중종조 훈구파가 사림파인 "조씨(조광조, 趙光祖)가 왕이 되려 한다(走肖爲王)"는 소문을 퍼뜨려 사림파들을 숙청한 사건입니다.


최근에는 사회적 비꼼이나 개인의 불만을 표시하는 도구로 한글 애너그램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한글의 특성상 의미를 바꾸기보다는 직설적 표현이나 게시판의 필터링을 피하기 위해 '슴가(가슴)'나 '대박전문(문전박대)', '게살바르자(바르게살자)' 등 비속어나 은어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국 소설가 새뮤엘 버틀러는 1872년 소설 'Erewhon(에레혼)'을 발표합니다. Erewhon은 'nowhere(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거꾸로 해서 만든 단어로 '미지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멋진 한글 애너그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에레혼'일까요?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데 비속어와 은어로 비틀린 한글만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멋진 한글 애너그램를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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