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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미세먼지 물러나니 ‘베란다 점령군’ 비둘기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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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풀리자 아파트 에어컨 실외기 등에

비둘기 둥지 틀고, 알 낳으며 피해 늘어

유해조류 지정된 지 10년…대책은 뒷짐

환경부선 그동안 개체 수 파악조차 안 해

구청에서 조류 기피제 제공하는 게 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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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알을 품고 있던 어미 비둘기가 날개를 푸덕거리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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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김모(36)씨는 지난 23일 오전 베란다를 청소하다가 깜짝 놀랐다. 에어컨 실외기 옆, 폭이 20㎝도 안 되는 틈새에 비둘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알 두 개를 품고 있었다. 빗자루로 쫓아내려고 했지만 제법 몸집이 큰 어미 비둘기가 날개를 푸덕거리며 저항해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김씨는 “가끔 ‘꾸루꾸루’ 하는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미세먼지 극성에 창문을 열지 못했다”며 “그 사이 비둘기가 베란다를 점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미 창틀과 바닥은 비둘기 배설물, 깃털, 나뭇가지 등으로 엉망이 돼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문의했더니 “전문 업체를 불러 비둘기 퇴치망을 설치하는 게 좋다”는 답이 왔다.

지난 20일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 단지 내 수백 개의 태양광 집열판엔 비둘기 배설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 단지에 사는 최모(여·73)씨는 “해가 뜨기 전부터 비둘기 떼가 ‘구구’거려 거의 매일 새벽잠을 설치는데 비둘기 배변으로 아파트 미관도 흉해졌다”며 혀를 찼다.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는 맹금류인 매가 자주 나타난다. 비둘기 개체 수가 급증하자 천적인 매가 아파트 단지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새끼를 잡아먹는 것이다.

집비둘기는 과거 음식물 쓰레기를 잘 주워 먹고 살이 쪘다는 뜻으로 ‘닭둘기’로 불렸다면, 요즘엔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 ‘진둘기(진드기+비둘기)’ ‘비둘쥐(비둘기+쥐)’, 사람에게 거세게 달려들어 ‘매둘기(매+비둘기)’ 같은 별명을 추가로 얻었다.

비둘기는 무엇보다 번식력이 왕성하다. 한겨울을 포함해 한 해에 4~6번 산란하는데 보통 2개씩 알을 낳는다. 불과 17~19일이면 부화하고, 30~40일이면 성체로 자란다. 최근 경기·충청·경남 등에선 대만에서 날아온 ‘레이싱 피죤’도 발견되고 있다. 주로 대만인들이 경주용으로 사육한 것인데 수백㎞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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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베란다에서 알을 품은 어미 비둘기가 날개를 푸덕거리고 있다(왼쪽). 에어컨 실외기 주변이 비둘기 배설물로 가득하다(가운데, 한석관씨 제공).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 단지 태양광 집열판에 비둘기 분비물이 묻어 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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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는 집비둘기를 2009년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했다. 이듬해엔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재산상 피해를 입으면 포획할 수 있다는 관리 지침도 마련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비둘기 피해 민원은 2017년 714건이 접수됐다. 서울에서만 233건이었다.

하지만 대응은 소극적이다.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조류 기피제를 나눠주고, ‘먹이를 주지 말라’는 현수막을 걸어둔 게 고작이다. 가장 기본업무인 개체 수 파악조차 안 돼 있다. 환경부 생명다양성과 관계자는 “각 시도를 통해 취합한 비둘기 개체 수는 2017년 기준 2만5788마리”라면서도 “정확한 집계는 아니다”고 했다. 지금까지 공식 조사는 서울시의 의뢰로 한국조류보호협회가 2009년 시행해 “서울시내 비둘기가 3만5000마리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전부다. 다수의 조류 퇴치 업계 관계자는 “어림짐작으로 서울에만 20만~50만 마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뒷짐을 진 사이 비둘기 퇴치 전문업체가 등장했다. 수도권에만 20여 곳이 영업 중이다. 비둘기 알·새끼 제거와 소독, 퇴치망·버드스파이크(끝이 가늘고 뾰족해 새가 앉지 못하도록 고안된 플라스틱 제품) 시공을 하고 25만~30만원을 받는다. 경력 7년차인 한석관 버드존 대표는 “대개 2월 중순부터 문의가 늘어나 하루 2~4건 작업을 한다”며 “오래된 아파트 다섯 채 중 한 곳이 비둘기 서식처라고 보면 된다. 해가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퇴치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관리연구실장(수의사)은 “비둘기 퇴치에 성공한 나라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영국·스위스 등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 벌금을 물리고, 미국에서는 불임 약물이나 조련된 맹금류를 사용해 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유전자 조작이나 불임 수술 역시 현실성이 떨어지고 동물복지 단체가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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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비둘기 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병균을 옮길 것이란 우려가 더해지면서 ‘매둘기’ ‘비둘쥐’ 같은 오명이 붙었다. [중앙포토]




김 실장은 “도심 공원에 대형 비둘기집을 지어 알을 낳게 하고, 가짜 알을 넣어줘 산란주기를 흩트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최소한 대도시에서 먹이 주기 규제 같은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상재 기자 lee.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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