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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LPG차 허용, 홍남기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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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여당이 일반인에게 LPG 차량 판매를 허용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경제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가 배제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체면을 크게 구긴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LPG 차량 일반 판매는 정부 재정과 환경·산업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쳐 지난 30여 년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한 사안이다. 이런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기재부가 '패싱'당하면서 "홍남기 부총리가 경제 사령탑"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 무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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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령탑’인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말이 청와대와 여당에 의해 뒤집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데다, 최근에는 총리실과 여당 주도로 LPG 차량 일반인 판매가 결정되는 과정에서도 배제돼 ‘홍남기 패싱론’이 대두되고 있다. 기재부가 지난 21일 국회에 출석해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는 홍 부총리를 이낙연 국무총리가 바라보고 있다. 홍 부총리는 이 총리를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하다 부총리에 발탁됐다.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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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충분한 검토 없이 속전속결로 결정되면서 졸속 정책이란 지적과 함께, 향후 세수(稅收)와 자동차·에너지 산업 정책은 물론 온실가스 감축 계획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정부 내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LPG 차량을 일반에 판매하면 오존 수치가 올라가고, 자동차 시장이 왜곡되는 등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정부 내에서 이런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는데 민주당과 총리실이 주도해 경제 사안을 결정해버렸다"고 말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낙연 국무총리를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하면서 이 총리의 신임을 받아 부총리에 발탁된 것으로 전해졌다.

37년 논란이었는데… 일주일도 안 돼 기재부 배제한 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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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홍남기 부총리는 당·정이 지난 11일 LPG 차량 규제 폐지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뒤늦게 전해 듣고 격노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기재부 관계자들을 크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LPG 차량 판매 규제 완화는 사회 분야 대책으로 총리실을 통해 청와대 보고가 이뤄져,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도 관련 내용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홍 부총리는 최근 증권거래세 인하, 소득공제 축소 백지화 등으로 가뜩이나 경제 수장으로서 영(令)이 안 선다는 지적이 나오던 터여서 또다시 존재감에 흠집이 났다는 지적이다.

LPG 차량 일반 판매 허용 결정은 지난 5일 문 대통령이 "미세 먼지 대책은 환경부 혼자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니, 모든 부처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대통령과 총리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지시한 뒤 1주일도 안 돼 이뤄졌다. 문 대통령 지시 이후 민주당과 산업통상자원부는 11일 당정 협의를 갖고 LPG 차량 관련 규제를 전면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관련 법안은 12일과 13일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를 차례로 통과했다.

LPG 차량을 일반인에게 허용할지 여부는 LPG 택시가 보급되기 시작한 1982년 이후 37년간 이어진 논란이다. 택시, 장애인, 국가유공자, 렌터카 등에만 허용됐던 LPG 차량은 1995년 7인승 이상 승합차에 한해 일반인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자 저렴한 연료비 덕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정부는 LPG 승용차를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세수가 크게 감소할 것이라는 판단에 포기했다. 이후 2000년 유류세 개편으로 LPG 가격이 오르면서 LPG 차량의 인기도 차츰 시들해졌다.

이후로도 LPG 차량 규제 폐지는 업계와 정부 내부에서 찬반이 팽팽히 맞선 뜨거운 감자였다. LPG 업계와 환경부는 오염 물질 배출이 적은 LPG 차량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정유업계와 산업부는 세수 감소, 연료 공급 불안정 등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다. 찬반이 워낙 팽팽한 사안이라 정부가 미세 먼지 저감을 이유로 LPG 차량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경차나 일정 배기량 이하 승용차 등으로 점진적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소비자 선택권 넓어지지만… 온실가스 감축 비상, 3000억 세수 감소

이런 예상을 깨고 정부가 LPG 차량 규제를 단번에 전면 철폐하면서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넓어지고 연료비 부담이 감소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충분한 검토 없이 내려진 졸속 결정으로 여러 부작용도 우려된다.

당장 연 3000억원가량 세수 펑크가 나면서 재정 운용에 부담이 가중될 전망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세수가 작년만큼 좋지 않은 상황에서 증권거래세 인하, 미세 먼지 추경, 대규모 토건사업 등 ‘돈 쓰는 정책’들이 줄줄이 추진되면서 이미 재정 운용에 부담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LPG 차량이 1990년대 후반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면 정부가 LPG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온실가스 감축에도 비상이 걸렸다. LPG 차는 경유차에 비해 미세 먼지나 질소산화물이 덜 배출되지만, 연비가 떨어지기 때문에 같은 거리를 운행할 경우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더 많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한국도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달성해야 하는데 미세 먼지에만 올인해 LPG 차량 규제를 단번에 푸는 바람에 온실가스 감축에서는 치명적인 부담을 안게 됐다”고 말했다.

수소·전기자동차 중심으로 추진되던 친환경·미래차 산업 정책도 꼬이게 됐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LPG 차는 우리나라 외에는 타는 나라가 거의 없어 차를 만들어도 수출할 데가 거의 없다”며 “전기차와 수소차에 지원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LPG 차량까지 밀어주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최규민 기자(qm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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