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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지역구 선거도 소신투표…“독일엔 사표심리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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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형 비례제 나라를 가다 - 독일

정당득표만큼 의석 배분하기에

‘차선·차익’ 전략투표 필요 없어

“모든 표가 정치권 향한 메시지”

새로운 정당 등장에도 큰 도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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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투표에서는 거대 양당인 기독교민주연합(CDU)이나 사회민주당(SPD)이 당선될 게 뻔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녹색당 후보를 지지한다. 내가 이렇게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정당 투표’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대학 강사 토마스 클레어(47)는 자신의 역대 독일 연방 하원의원 선거 투표 행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소신 투표는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사표 심리에서 자유롭고, 정치 상황 따라 맞춤형 투표도

독일 국회의원 선거는 ‘1인2표’제로, 제1투표는 단순 다수대표제(FPTP) 방식으로 지역구에서 최다득표자 1명이 선출된다. 제2투표는 지지하는 정당에 표를 던져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 투표 방식과 같다. 하지만 의석을 배분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지역구 투표는 지역구 의원(253명) 선출에만, 정당투표는 비례대표 의원(47명) 선출에만 별개로 효력을 발휘하는 ‘병립형’이다. 반면 독일은 먼저 정당 투표에 따른 정당득표율로 각 정당의 전체 의석을 결정한 뒤, 각 정당이 획득한 지역구 의석수(총 299석)에서 모자라는 의석만큼 비례대표 의석(299명)으로 채워주는 ‘연동형’ 방식이다.

한국의 지역구 선거에서는 지지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낮으면 ‘최악의 후보’ 당선을 막으려고 ‘차선이나 차악의 후보’에게 표를 주는 ‘사표 방지 심리’가 발동한다. 하지만 독일의 ‘연동형’ 의석배분 방식은 결과적으로 정당득표율대로 의석이 배분되기 때문에 지역구 선거에서 우리처럼 ‘전략 투표’를 하지 않고 ‘소신 투표’를 할 수 있다. 클레어는 “지역구에서 당선 가능성 낮은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은 당선 가능성 높은 후보와 그들의 소속 정당들에 보내는 유권자의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사표’가 되지만, 독일에서는 ‘메시지’가 되는 셈이다.

대학생 라우라 아르테미스 코진스키(24)는 2017년 총선에서 생애 첫 투표를 했다. 전략적 투표에 대한 갈등 없이 인물 투표와 정당 투표에서 모두 녹색당을 지지했다. 그는 “지역구에서 녹색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없었지만 내 마음에 드는 당을 그렇게라도 지지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독일 유권자들은 투표 전략도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구사한다. 교사인 베냐민 핑커나일(46)은 2013년 총선에서 “기민련이 자유민주당(FDP)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인물 투표는 기민련에, 정당 투표는 자민당에 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2009년과 2017년 선거에서는 기민련이 압도적 지지율로 제1당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물 투표와 정당 투표를 모두 기민련에 했다”고 했다.

■ “지역구-비례대표 혼합한 연동형 바람직”

독일에서 만난 현역 정치인이나 전문가들의 조언은 현재 국내에서 논의 중인 선거제 개혁과 관련해서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줬다. 독일은 1950년대부터 현재와 같은 연동형 비례제의 틀을 60여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해왔고, 승자독식의 단순 다수대표제를 운용했던 뉴질랜드, 스코틀랜드 등도 독일식 연동형 비례제로 선거제도를 바꿔 운용하고 있다.

기민련의 3선 중진인 파트리크 젠스부르크(48) 의원은 “지역구 100%나 비례대표 100% 선거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독일과 같은 혼합식 연동형이 좋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유권자의 이익이 인물 투표나 정당 투표 가운데 어느 하나로 대변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자신은 보수 거대정당 의원이지만, 소속 정당의 이익만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모든 유권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시민들 요구가 너무 다양해 거대 양당이 이를 모두 담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헌법학자이자 선거제도 전문가인 한스 마이어 전 훔볼트대 총장도 <한겨레>와 만나 “지역구 선거와 정당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는 혼합형 비례제(MMP)가 독일 선거제도의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구 선거 100%를 선호하는 기민련과 이에 반대하는 사민당·자민당 사이에 찬반 논란이 많았지만, 그 뒤 이를 절충한 사회적 합의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 다수당과 소수당의 공존

독일에서는 1차 세계대전 패배로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이 성립되면서 당시엔 집권 사민당이 내세운 100% 비례대표제가 새로운 선거제로 채택됐다. 하지만 이는 수많은 정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극단적인 다당제를 초래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 선거제 논의 때는 기민련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선거제가 극단적인 다당제를 불러 나치의 합법적 의회 입성을 초래했다”며 안정적 다수파에 유리한 영국식 단순 다수대표제 도입을 주장했지만, 독일의 최종 선택은 연동형 비례제였다.

1953년 연방선거법을 고쳐 ‘1인 1표제’에서 ‘1인 2표제’로 하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 비율도 기존 6:4에서 1:1로 바꿨다. 1956년엔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는 기준이 되는 봉쇄조항을 ‘지역구 3석 또는 정당득표 5% 이상’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 봉쇄조항이 군소정당의 의회 진출을 어렵게 했지만, 1983년 총선에서 거대 양당과 자민당의 3당 체제가 깨지고 녹색당이 처음 원내에 진출했다. 1990년대에는 5당 체제, 2017년 총선에서는 6당 체제가 됐다.

■ 다양한 정치적 요구 수용 가능

연동형 비례제는 단순 다수대표제에 견줘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의 문턱을 낮추고,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를 의회가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05년부터 비례대표로만 4선을 한 녹색당 중진 브리타 하셀만(58) 의원은 “영국·미국 같은 단순 다수대표제였다면 나는 4선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녹색당 같은 소수정당이 원내에서 이 정도 의석(67석)을 갖고 있는 건 선거제도의 덕택이다. 녹색당뿐 아니라 자민당, 좌파당 등이 많은 의석수를 얻게 된 것도 연동형 비례제의 효과”라고 했다.

녹색당은 1983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만 27석을 얻으며 연방하원에 처음 진출했다. 이후 환경·생태·평화·소수자·신좌파 등 기존 정치권의 문법과 다른 새로운 정치적 의제들을 내놓으며 기존 정치권이 포용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을 향해 저변을 넓혀갔다. 이후 녹색당은 꾸준히 비례대표로 의회에 진출했지만, 지역구 의석을 처음 얻은 것은 의회 진출 19년 만인 2002년 총선에서였다. 그것도 단 1석뿐이었다. 이후에도 2017년 총선까지 지역구 의석은 줄곧 1석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녹색당의 당세는 꾸준히 확장됐고,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끈 사민당(당의 상징색이 적색)과 함께 ‘적-녹 연정’을 이뤄 정권의 한 축을 맡기도 했다. 하셀만 의원은 “녹색당 입장에서는 100% 순수비례제를 도입하고 싶지만 (제도를 바꾸기에는) 의회에서 숫자가 모자라다”면서도 “연동형 비례제는 그동안 안정적으로 운용돼왔다”고 했다.

의회의 문턱을 낮춘 연동형 비례제는 다양성 반영으로 연결된다. 김상국 베를린자유대 교수(정치학)는 “독일의 선거제도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시대는 바뀌는데 기존 정치권이 시민들의 새로운 요구에 반응하지 않으면 30여년 전 녹색당처럼 참신한 세력이 원내에 진출하게 되고, 그러면 구정치권은 이에 대해 긴장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자발적 경쟁에 나서게 되는 긍정적 효과도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2017년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원내 3당이 된 것을 두고는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동형 비례제의 부작용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하네스 모슬러 베를린자유대 교수(정치학)는 “난민 문제가 계기가 됐는데 그 이면에는 실업과 경제적 어려움, 소외감 등이 깔려 있고 이에 대해 기민련이나 사민당 등 거대정당들이 시민의 요구에 잘 대처하지 못한 탓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에리크 린하르트 켐니츠 공대 교수(정치학)는 “연동형 비례제를 시행하지 않는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다른 유럽국가들에는 우파 포퓰리즘이나 극우 정당들이 독일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의회에 진출해 있었다”며 “오히려 연동형 비례제가 극우의 의회 입성을 지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베를린/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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