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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찌질한 상사 대신 욕해줍니다…‘감정 대리’ 콘텐츠 인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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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사무실에서 열린 ‘감정 카드 모임’ . 참가자들이 평소 표현해내지 못한 감정 상태를 카드를 통해 드러내며 서로 위안과 공감을 전해주는 곳이다. 이처럼 감정을 대신 풀어주는 상담과 상품,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최근 공감을 얻고 있다. 유원모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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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저녁 7시 반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사무실.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었지만 서로 얼굴을 모르는 30대 직장인 5명이 모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사회자가 정적을 깼다.

“최근 여러분이 느낀 감정이 적힌 카드를 골라볼까요.”

‘짜증나는’ ‘서운한’ ‘안도감’ ‘행복’ 등 50여 개의 감정이 표현돼 있는 다양한 카드를 저마다 꺼내들었다. 모임에 참여한 기자 역시 ‘답답한’ ‘화남’ ‘홀가분한’ 등의 카드를 선택했다.

“도무지 맞지 않는 상사와의 갈등 끝에 회사를 그만뒀죠. 하지만 지금은 가족들만 더 힘들게 하는건 아닌지 원망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수가 없네요.”

“‘망했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입에서 사라지질 않아요. 원래 꿈꿨던 목표가 계속 수정되고, 아이를 낳은 지금은 새로운 도전이 가능할까 걱정이 돼요.”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각자의 속마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마음 속 느껴지는 감정이 있지만 정작 어떻게 표현하고, 풀어내야할지 모르고 있던 것. 한 참가자는 울컥이며 직장생활의 고충을 털어놨고, 다른 이들은 “나 역시 그랬다”며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넸다. 3시간여의 시간이 흘렀다. 기자를 포함한 참가자 5명은 홀가분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이 모임을 만든 이남희 스트레스 컴퍼니 대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해 늘 답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2013년부터 감정 해소를 돕는 모임과 굿즈를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했다”며 “특히 올해 들어 참가자들이 늘고 있는데, 스트레스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2030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최근 쉽사리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감정 표현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화가 쌓이면 병이 나는 법. 응축된 감정을 대신 풀어주는 상품, 서비스, 대중문화 콘텐츠들 역시 덩달아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감정 대리 사회’다.

이 같은 현상은 ‘카카오톡’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에서 말 대신 이모티콘으로 대화하는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4일 카카오에 따르면 2012년 2012년 4억 건에 불과했던 월간 이모티콘 발송량은 2013년 12억 건, 2015년 20억 건으로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무려 22억 건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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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카카오톡 이모티콘인 ‘케장콘’. 온라인 대화에서 직접적인 말 대신 감정을 대신 보여주는 ‘이모티콘’의 사용 증가는 ‘감정 대리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카카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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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관계자는 “5~6년 전만 하더라도 잘 그려진 이모티콘이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에는 정교하진 않지만 기쁨, 슬픔 등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이모티콘이 각광받고 있다”며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경우가 증가하다보니 메시지 전달력, 표현력 등이 주요 심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대신 상사 욕해주는 페이지’ ‘대신 찌질한 페이지’ 등 감정 대행 사이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연을 소개하거나 대표적인 스트레스 사례 등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글을 게시하는 방식으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구독자를 자랑한다. 출판계와 가요계에서는 감정 상태에 맞는 책과 음악을 소개해주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다.

김지호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 감정의 적절한 발산법을 익혀 나가지 못한 현대인이 증가하면서 관련 감정 대리 관련 산업 역시 인기를 끄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 같은 상품과 서비스 역시 근본적으로 감정 조절을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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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감정을 표현해 독자들로 부터 공감을 얻은 에세이 ‘당신의 사전’(왼쪽)과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 ‘감정 대리’ 도서들 인기 ▼

김버금 작가 ‘당신의 사전’은 카카오의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글이다. 우리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마음속 감정들을 ‘남모르다’, ‘소중하다’, ‘이상하다’ 등 정돈된 언어로 표현해 이달 초 발표된 ‘제 6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의 대상을 수상했다. 김 작가는 이 책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출간했다. 최초 모금 목표액은 130여만 원 이었으나 200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당초 예상 금액의 3배가 넘는 470여만 원이 모였다.

김 작가 글이 입소문을 타고 호응을 얻은 이유는 누구나 일상에서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들, 그러나 말로 풀어쓰기 힘든 감정들을 단정하면서도 세밀한 언어로 정리해냈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모른 채 흘려보냈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며 “매일 감정을 들여다보고 기록하다 보면 조금 더 나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또 “‘감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며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많은 연습을 해왔지만 정작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에는 서투르다”고 덧붙였다.

출판계에서는 지난해부터 일상에서 느끼는 각종 감정을 풀어쓰거나 감정을 위로하는 에세이들이 돌풍을 일으켰다. 최근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여전히 ‘감정’과 ‘공감’, ‘치유’를 키워드로 한 에세이, 인문학 서적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나 우울증과 불면증에 도움을 주는 책으로 입소문을 탄 ‘당신의 마음을 안아줄게요’(김지훈) 등이 그 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 같은 책의 문구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서 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저자에 공감하는 독자들도 많다.

최근에는 가벼운 우울증을 겪은 저자가 상담하는 과정을 다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같은 책도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어섰다. 심리상담이 일찍 발달한 영미권에서는 ‘우울증’등 부정적 감정을 직접적으로 다룬 에세이들이 일찍 인기를 끌었지만 국내에서 이 같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역에 대한 도서들이 주목은 받는 것은 큰 변화라는 것이 출판계 시각이다.

이서현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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