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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함평 금산리에 있는 일본식 고분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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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⑩ 한반도의 일본식 유적

길이 60m의 왕릉급 함평 고분

일본식 흙조형물, 토기 발견돼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 15기도

고대 일본에서 유래한 것 분명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 ‘도래인’

열도 문명·사회 발전에 큰 영향

왜인들도 백제·가야 정착 많아

한반도-일본 활발한 교류 증거를

상대방 정복·지배로 해석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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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심리 상태는 공간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지구 곳곳에 유사한 유적과 전승을 남겼다.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하데스가 통치하는 지하세계에 들어간 트라키아의 오르페우스가 일본에서는 이자나기노미코토(伊?諾尊)로 나타난다. <일본서기> 신대편(신들의 이야기)과 <고사기>에 등장하는 이자나기노미코토(이하 ‘이자나기’)와 그 누이이자 부인인 이자나미노미코토(伊??尊: 이하 ‘이자나미’)는 천지창조의 주역이다. 둘은 일본열도와 산천초목, 해와 달, 바람과 바다를 낳았는데, 마지막으로 불의 신을 낳던 이자나미는 그만 화상으로 죽게 된다. 이자나기는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황천에 가서 마침내 그녀를 만나게 된다. 이자나미는 남편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책망하면서 자신은 이미 황천의 음식을 먹었고 이제 누워 쉬려고 하니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이자나기는 말을 듣지 않고 횃불을 들어 이자나미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이미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져서 구더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깜짝 놀란 이자나기는 되돌아 나오려 하였고, 이자나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남편을 원망하여 그를 추격하였다. 긴 추격전 끝에 이자나기는 겨우 황천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설화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도입되면서 추가장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망하여 무덤방에 안치되어 있는 시신을 보게 된 친지의 반가움과 두려움을 반영한다. 이자나기가 지하세계인 황천으로 내려가는 과정은 땅속에 마련된 굴식 돌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고, 이자나기가 도망쳐 나오는 과정은 돌방에서 긴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상징한다. 컴컴한 돌방 안에서 부패되어 있는 시신을 본 뒤, 그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는 제법 담력이 있는 자라도 뒷덜미가 서늘했을 것이다. 황천의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이미 황천의 사람이 되어서 나갈 수 없다는 이자나미의 말은 저승의 음식을 먹으면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황천의 관념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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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반도→일본으로 퍼진 기나이형 석실

5세기 후반부터 일본열도의 심장부에 해당되는 기나이(오사카, 나라, 교토) 지역에는 새로운 무덤이 등장하였다. 시신을 위에서 아래로 넣고 한번 매장하면 그걸로 종료되는 종래의 장법에서, 다듬은 돌로 방을 만들어 부부나 친족 등 복수의 사람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기나이형 석실(돌방)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묘제가 도입된 것이다. 이런 무덤에서는 소형 취사용기(솥, 시루, 자배기, 부뚜막 등)와 반지, 팔찌, 비녀 등 귀금속제 장신구를 넣는 풍습이 자주 확인된다.

종전 일본학계의 입장은 기나이형 석실은 백제의 영향이지만 귀금속제 장신구와 취사용기를 껴묻는 풍습은 중국의 영향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취사용기의 부장은 무덤 안에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는 황천국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이승과의 인연이 단절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백제의 무덤에서는 취사용기와 귀금속제 장신구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기나이형 석실의 직접적인 기원지로서 백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에서 60기가 넘는 백제의 돌방무덤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그리고 흙으로 빚은 소형 취사용기가 많이 발견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일본 기나이형 석실과 장법의 원류가 백제 고분에 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치 않다. 무덤 안에 취사용기를 넣는 풍습은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낙랑, 나아가 한나라의 무덤에서도 수많은 예가 확인된다. 황천국의 사상 자체가 중국에서 만들어지면서 이와 관련된 저승관, 장례 풍습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퍼진 것이다. 이런 해석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삼최(三最: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 가장 훌륭한 최고(最高), 가장 큰 최대(最大))에 연연한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래된 문화는 대서특필하면서도 그 문화의 원천이 중국을 비롯한 외부였다는 사실의 인정에는 매우 인색하다. 외부의 영향을 인정하는 순간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2018년 12월26일,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가 열렸다. 전남 함평 금산리에 소재하는 한 변의 길이 60m급의 대형 무덤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통틀어도 왕릉급 규모이다. 신라의 황남대총 북분과 남분은 각각 그 직경이 70m 정도, 고구려의 장군총은 한 변이 30m, 태왕릉은 63m, 백제의 석촌동 3호분은 50m 정도이다. 무덤의 규모와 국가권력의 강도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규모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영산강 유역에서 최대급인 금산리의 고분은 삼국의 왕릉에 견주어도 그 규모가 처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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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덤은 바깥 전면에 돌을 타일처럼 입혔는데, 즙석(이음돌)이라고 불리는 이런 시설은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일본열도에서 발달하였다. 무덤의 외부에서는 흙으로 빚은 인물, 닭, 말 모양의 형상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일본열도의 고분 외부에 세워지는 하니와(埴輪)를 쏙 빼닮았다. 발견된 토기 중에는 일본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스에키(백제와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만든 회색의 단단한 토기)도 있었고, 중국 남조에서 생산한 도기와 자기도 여러 점 발견되었다.

그런데 유적 조사의 성과를 소개하는 자리가 영 어색하였다. 한반도 서남부에서 왜색이 짙은 무덤과 유물이 나왔으니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발굴 담당자는 “6세기 전반까지도 백제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던 마한세력의 활발한 국제교류의 흔적”이라 하면서,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이 조사와 전혀 무관한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없다”라고 마무리하였다. 담당자들의 곤혹스러움이 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배어났으며, 그 흔한 전문가의 멘트도 없었다. 그 누가 영산강 유역에서 왜색이 짙은 고분이 나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돌팔매질을 당하려 하겠는가?

2012년에 순천 운평리에서 전형적인 대가야 고분이 발굴조사되었을 때에도 언론이 뽑은 제목은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유물 대거 출토”였다. 사실은 “섬진강 유역까지 대가야 고분문화 확산 증거 발견” 정도가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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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동성왕 호위한 왜인 용병

우리 사회는 식민사학의 폐해로 인하여 지나치게 위축되고 한편으로는 격앙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가야사나 한일관계사 연구의 최종 목표는 언제든지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왜계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와 해석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자료의 공개나 연구를 꺼리는 분위기마저 형성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조사된 전방후원형 고분 중 아직 공식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것이 절반 정도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학계의 든든한 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모든 해석을 한가지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경향은 비이성적이다. 가야사를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황국사관을 용서할 수 없듯이, 일본 고대사를 한국인의 일본열도 정복사로 치부하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 한반도계 이주민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흔적과 그 의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왜인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활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때로는 신라를 침략하고 때로는 백제의 용병으로 고구려와의 전투에 동원되었다. 백제의 동성왕을 호위하여 웅진으로 들어온 왜인도 있었으며, 동북아시아의 해상 교류에 참여하여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오간 상인과 선원도 있었다. 그중에는 죽어서 한반도에 묻힌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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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은 직사각형, 뒤쪽은 원형인 전방후원분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외관의 고분은 일본의 나라 지역에서 3세기 중반 무렵부터 나타나서 6세기 말까지 수백년간 발전하였다. 지금까지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의 수는 5천여기에 달한다.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된 사실은 분명한 팩트이고 그 수는 15기 정도, 시기는 5세기 말~6세기 전반 무렵에 국한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한반도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뿌리라고 볼 수는 없다. 한반도가 발생지라고 강변할 필요도 없다. 일본에서 유래한 전방후원형 고분이 왜 한반도 서남부에 남아 있는지, 그 국제적인 계기는 무엇인지, 그 안에 묻혀 있는 인물의 정체는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열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고분문화,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자유로워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화산학과 고고학의 학제 간 연구에 의하여 순식간에 벌어진 일본 군마지역 일가족의 비극을 묘사하려는 지난 3월9일치 연재도 필자의 의도와는 동떨어지게 “백제의 선진기술이 미개한 일본열도를 깨우쳐준” 사건 정도로 치부되고 이에 환호하는 것이 우리의 냉정한 현주소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실상은 무엇일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고대 한국인의 일본열도 정복의 역사도 아니고, 야마토 조정의 한반도 남부 지배의 역사도 아니란 것이다. 극단적 주장은 실상을 호도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고대 국가들과 일본열도의 여러 정치체들은 각각 자국, 혹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바다를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그 이익은 정치, 외교적인 이익일 수 있고 경제적인 이익일 수도 있다. 일본열도에 이주 정착한 한반도계 이주민의 수는 어마어마하고 이들이 일본의 문명과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왕실에 한반도계 주민의 피가 섞여 있음도 사실이고, 유력한 지배집단 중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주민이 중심이 된 경우가 많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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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임나일본부설 타도’

일본학계에서 도래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일본의 장수들에 의해 노예사냥 당하듯이 포로로 잡혀 오거나, ‘천황’의 덕을 흠모하여 자발적으로 귀화하였다는 과거의 견해는 이미 부정되었다. 전쟁 포로로 잡혀 온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를 피해 이주하거나 선진 기술과 문화를 갈구하는 일본 지배층의 간청에 의해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초래한 475년 백제 한성의 함락, 663년 백강전투의 패배로 인한 백제 부흥운동의 종말은 한반도 남부의 주민 집단이 무리를 이루어 일본열도로 정착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 결과 일본열도 곳곳에는 한반도계 이주민과 관련된 지명, 전승, 유적과 유물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이다. 그 양은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왜계 유적, 유물의 수백배는 될 것이다.

21세기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무대로 전개되던 수많은 집단들의 다양한 형태의 교류(전쟁, 혼인, 이주, 교역)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철 지난 “임나일본부설의 타도”를 외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이주민의 역사를 오롯이 복원하는 작업에 몰두하여야 한다. 일본 땅속에서 출토된 한반도계 이주민의 수많은 흔적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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