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군산공장 폐쇄 1년 위에 내려앉은 각자도생의 공포

댓글 6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토요판] GM이 버린 도시

③ 군산공장 폐쇄 1년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 발표 1년

북미 공장 5곳 폐쇄 등 구조조정 계속

한국, ‘철수 수순’ 의혹 생산·연구 분리

군산은 인구 2천명 감소 실업률 증가

개인·가족·도시 전체 흔든 비상사태

부모님은 평생 농사지은 땅 내놓고

희망퇴직자 매형 퇴직금 털어 식당

해고자 처남까지 온가족 운명 걸어

공공근로로 버티는 전환배치 대기자

‘사업효율화’ 최말단 꼬리무는 불안





▶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지난해 2월13일·공식 폐쇄는 5월31일)한 지 1년이 지났다. 군산공장 폐쇄 뒤에도 글로벌지엠의 구조조정은 계속됐다. 수익 효율화에 맞춰 전세계 공장 7곳의 폐쇄와 인력감축을 발표했고, 한국지엠은 ‘철수 수순’이란 반발을 사면서도 생산과 연구개발 부분을 분리했다. 지난 1년 사이 군산의 희망퇴직자들은 희망을 찾지 못했고, 다른 공장으로의 전환배치 신청자들은 3분의 2가 아직 전환되지 못했다. 구조조정의 최말단에서 밀어내고 밀려나는 불안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텅 빈 주차장을 바라보며 강동위(가명·40대 초반)가 담배를 피웠다.

“차들로 북적일 날이 오겠지.”

그가 바람을 담아 연기를 내뿜었다. 아직 봄의 훈기를 싣지 않은 바람(지난 6일)이 그의 바람을 실어갔다.

온 가족의 바람과 재산을 모아

차를 몰고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빠진 뒤 논 사이로 난 소방도로를 따라가면 ‘이런 곳에 족발가게라니’ 싶은 장소에 문을 연 지 보름 된 족발가게(전북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가 있었다. ‘이런 곳’은 강동위의 부모님이 씨 뿌리고 거두던 논밭 터였다.

1년 전 한국지엠이 군산공장을 폐쇄(2월13일 발표·5월31일 공식 폐쇄)한 뒤 그는 그 논에서 부모님의 농사를 도왔다. 정확히는 해고노동자가 된 4년 전부터였다. 강동위(1회 등장인물)는 ‘파견법’(1998년 제정)이 양산한 첫 비정규직 세대였다. 1999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사내하청이 된 그는 “사대부(정규직)와 머슴(비정규직)의 신분 차이”를 몸으로 겪었다. 지엠 군산공장 정규직이었던 매형의 소개로 2006년부터 전주에서 군산으로 출퇴근하며 지엠의 사내하청으로 일했다. 2015년 군산공장이 2교대에서 1교대로 전환(지엠 본사의 유럽시장 철수로 생산량 감소)할 때 정규직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해고됐다.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한 바로 그날 그는 법원에서 정규직 지위(근로자지위확인소송 1심 승소·회사 항소)를 인정받았다.

군산공장 폐쇄 1년 뒤 그는 그 논을 밀고 낸 족발가게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가족 전부의 바람과 재산을 털어 넣은 가게였다. 부모의 논에 가게를 열고 1남(강동위)5녀 중 4명이 달라붙었다. 공장 폐쇄 때 희망퇴직을 선택한 매형이 퇴직금을 묻었다. 막내누나(매형의 아내)가 사장이었고 첫째·둘째 누나들이 홀과 주방을 맡았다. 강동위는 손님을 모으고 가게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전주에 살던 그는 집도 족발가게 이층으로 이사했다. 군산공장 폐쇄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비상사태였다.

매형 박일규(가명·40대 후반·1회 등장인물)는 희망퇴직을 후회했다. 평생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로 살았던 그가 회사를 떠나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퇴직 직후 그는 농수로 정비 현장에서 일당 벌이를 했다. 새 직장을 얻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황장애도 앓았다. 대형 면허를 따서 버스 운전대를 잡았지만 오래하지 못했다. 그는 퇴직금을 모아 족발가게에 넣었다. 식당 운영은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식자재 배달업체에 최근 취직했다. 그의 개업 소식에 군산공장 동료들이 찾아와 족발을 사먹었다. 일을 구하지 못한 희망퇴직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동차 부품업체에 운 좋게 재취업해 저임금으로 일하는 동료도 있었고, 희망퇴직을 보류하고 한국지엠의 다른 공장(인천 부평·경남 창원·충남 보령)으로 전환배치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옛 동료들이 오랜 만에 모여 삼킨 소주는 웃음보다 탄식으로 썼다.

군산공장 폐쇄는 도시 전체의 비상사태였다. 폐쇄 1년 사이 인구 27만의 군산에서 2600여명이 빠져나갔고 실업률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2.5%포인트 상승(1.6%→4.1%)했다.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벌이는 글로벌지엠은 국가와 정부 단위로 협상했다. 철수와 잔류를 둘러싼 거대 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개인과, 가족과, 일개 도시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협상에 끼지 못한 채 비상사태로 던져졌다. 공장 폐쇄 1년의 시간 위로 비상사태의 영구화와 각자도생의 공포가 군산에 내려앉고 있었다.

비상사태 안에서도 ‘등급’은 나뉘었다. 군산공장 폐쇄로 직장을 잃게 된 정규직들이 암흑 같은 미래에 절망하고 있을 때, 이미 그들의 ‘고용 방패막이’로 일을 잃은 강동위는 그들에게 닥칠 생활고를 수년째 먼저 겪고 있었다. 그에겐 고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와 이제 4살 된 작은 아이가 있었다. 해고 5년차가 된 그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짓눌리면서도” 공장으로 돌아가길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지엠 비정규직 9년을 포함해 “각종 비정규직”으로만 18년을 살았다. 대법원까지 갈 것이 분명한 소송에서 “악으로 깡으로 이겨 하루라도 정규직으로 일할 날”을 꿈꿨다. 버텨야 할 시간이 얼마나 길지 알 수 없다는 사실보다 정규직으로 돌아갈 공장이 군산엔 없다는 사실이 그는 두려웠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 받는 공공근로

군산에 지엠은 없었다.

군데군데 벗겨지고 파손됐으나 보수되지 않은 쉐보레 로고가 군산공장 정문 간판 위에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공장 앞 삼거리에서 ‘GM Korea’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가도 군산에 더 이상 지엠 코리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1년 전까지 그 이름으로 불렸던 건물만 휑하게 남아 ‘군산의 지엠’을 기억했다.

1년 전 매일 출퇴근하던 정문으로 ‘퇴직을 희망하지 않은 희망퇴직자’ 1200여명이 걸어나갔다. 전환배치를 기다리던 612명 가운데선 1년 동안 240여명(1차 부평 16명·창원 58명·보령 10명·사무직 등 26명·생산 지원인력 90명 등 200명+2차 부평 40여명)만 다시 일을 배정받았다. 대기자 중 50여명은 창원공장으로 임시 파견(수출물량 조립)됐고, 40여명은 군산공장 안에서 에이에스(AS) 부품 생산에 일시 투입됐다. 김지상(가명·40대 중반·1~2회 등장인물)은 그들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김지상(정규직)은 군산공장이 위치한 소룡동에서 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살았다. 대우자동차 시절 군산공장 첫 가동(1997년) 때부터 일하며 입사 3년 만에 회사 부도(2000년)를 겪었다. 다시 18년 뒤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를 맞은 그는 “심리적 통제불능”을 겪으며 희망퇴직 대신 전환배치 대기를 선택했다. 지난 1년 사이 그는 전환배치 후순위로 계속 밀렸다.

하루 8시간에 시간당 8350원.

김지상은 지난 3월초부터 3개월짜리 공공근로(고용위기지역 지원 사업)를 시작했다. 2017년 7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철수(지엠 공장 폐쇄와 더불어 군산 경제위기의 한 축)한 오식도동에서 풀을 뽑았다. 정부는 전환배치 대기자들(휴직자 신분)에게 생활고를 해결하도록 아르바이트를 허용했으나 동종업계 근무는 금했다. 공공근로를 하기 전 김지상은 인력사무소가 소개하는 건설현장을 찾아다니며 1년을 살았다.

전환배치 대기자들에게 노사가 5 대 5로 부담하기로 했던 생계지원금(225만원)은 절반(107만원)만 지급됐다. 군산공장 폐쇄 발표 직후 한국지엠 노사 단체협약으로 매듭짓지 못한 대기자 생계지원안은 결국 반쪽짜리(노조는 빠지고 회사만 부담)로 남았다. 군산공장 폐쇄 뒤 한국지엠이 생산 부문(기존 한국지엠)과 연구개발 부문(2019년 1월 지엠TCK 출범)을 분리하는 등 고용 불안이 커지자 노조는 조합원들의 추가 결의가 필요한 생계지원안 처리 절차를 밟지 않았다.

법인 분리로 군산의 김지상은 더욱 불안해졌다. ‘글로벌 규모’의 사업에서 그의 불안은 보이지 않았다. 지엠 본사는 지난해 11월 북미 5곳 등 7곳의 공장 폐쇄와 1만4천명의 감축 계획(60억달러 비용을 절감해 자율주행차 등에 투자)을 내놨다. 전세계로 확장경영을 펼쳐온 지엠은 해당 국가의 정치적 지원을 받으며 공장을 열고 수익이 나지 않으면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았다. 공장을 버릴 때 버려지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과 그들의 도시는 고려되지 않았다. 정부 지원금(지난해 5월18일 지엠은 산업은행으로부터 8100억원을 지원받는 기본계약서를 체결)을 따내자마자 한국지엠은 법인 분할을 단행했다. 한 개의 회사가 두 개로 쪼개졌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같은 회사였다가 갑자기 다른 회사 소속이 된 직원들은 예전처럼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고, 예전처럼 통근버스를 같이 탔으며, 예전처럼 회사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긴 뒤 철수하기 쉬운 구조로 만드는 것이 법인 분할의 진짜 의도’란 인식이 회사 구성원 전체에 각인됐다. 지난 14일 지엠TCK 노사교섭에서 사쪽은 ‘회사의 합병·양도·이전 때 노조와 협의하지 않고 통보만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단체협약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지엠의 ‘글로벌한 사업효율화’는 한국의 작은 도시 노동자에게 흘러와 삶을 흔드는 구체적 위협이 됐다.

“정말 이 회사에 우리의 미래는 없구나.”

부평공장(한국지엠 본사격)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접하면서 김지상은 생각했다. 그는 평생 몸담아온 공장의 급변과 그 공장에서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찔했다. 거대기업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개별 노동자들을 어떻게 떨어내는지 김지상은 스스로를 통해 보고 있었다. 언젠가 떨려날 줄 알면서도 오늘은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자신이 안쓰러웠다. 김지상과 ‘다른 김지상들’은 서로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남은 일자리를 두고 다퉈야 했다.

“9월엔 꼭….”

부평공장으로 전환배치를 신청한 김지상은 자신의 차례가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했다. 군산공장 폐쇄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한 그는 부평 신청자 중 앞순번을 받을 줄 알았다. 투쟁참여도가 높을수록 전환배치 때 우선 순위를 부여한다고 노조가 약속했으나 그는 아직 군산에 있었다. 회사와 노조는 전환배치 대기자들에게 각자의 순서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기자들은 통보가 올 때까지 답답함을 누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함이 가슴으로 치솟을 때마다 회사와 조합을 향한 불신도 커졌다. 부평2공장을 2교대로 복원(1공장에 신차 배정 뒤 1공장 생산 차종인 트랙스를 2공장으로 옮겨 생산)하는 오는 9~10월께 대기자들의 부평 배치가 이뤄질 것이란 노사의 설명에 김지상은 기대를 걸었다. 지엠은 지난해 7월 부평2공장 가동률이 30%에 불과하다며 2교대로 돌아가던 2공장을 1교대로 바꿨다.

밀리고 밀리는 존재들

“모든 해고에 반대한다.”

‘말리부’와 ‘이쿼녹스’가 빛을 발하는 광고탑 맞은 편에서 플래카드 구호들이 외쳤다. 부평공장 정문 앞에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집회(13일 저녁 수요문화제)를 열었다. 공장 굴뚝이 꿀럭꿀럭 하얀 연기를 올려보냈고, 집회 대오 끝에 선 전지환(가명·30대 중반·1회 등장인물)도 하얀 입김을 뱉었다.

부평공장 사내하청노동자 전지환은 2공장의 1교대 전환 여파(일자리 축소)로 해고됐다. 그는 지난해 5월 한국지엠 사장단의 기자회견장에서 비정규직 대책(법원의 정규직 지위 인정과 고용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에 따른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시위를 한 뒤 소속 업체로부터 자택대기를 당했다. 대기발령 상태에서 2공장이 1교대로 바뀌자 그는 공장 정문을 다시 넘어보지도 못한 채 해고자(지난 1월1일)가 됐다. 1차 하청 50여명과 2~3차 하청 150여명이 1교대 전환에 희생된 것으로 추산됐다.

전지환은 2006년부터 부평공장에서 일했다. 부품과 자재들을 조립라인으로 운반하는 일을 했다. 12년을 일하는 동안 그가 속한 사내하청업체는 4차례 없어졌다. 그도 정규직 지위확인 소송 1심 승소자였다. 회사는 그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신 해고자(소속 업체와 계약해지)로 만들었다.

거대기업이 구축한 서열의 말단에서 밀리고 밀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글로벌지엠이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군산공장은 부평공장과 창원공장에 밀려 ‘폐쇄 카드’로 선택됐고, 군산공장의 전환배치 신청자들은 다른 공장에 자리가 날 때까지 서로에게 밀리면서 대기했다. 오는 9월께 2공장이 2교대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전지환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진 알 수 없었다. 군산의 전환배치 대기자들이 우선 배정될 것이라고 회사는 설명했다.

전지환이 자택대기 상태일 때 그의 아내는 딸을 출산(지난해 10월)했다. 그는 더 밀려날 곳이 없었다.

군산·부평/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 [▶영상 그 이상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