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위근우의 리플레이]훈남·볼매남·짐승남…남성에게만 관대한 미 의식 못 버렸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MBC 새 예능 ‘호구의 연애’

정말로 호구 취급을 당하는 건 누구인가. MBC 새 예능 <호구의 연애>를 보며 든 생각이다. 연애에서 ‘을’의 입장이던 남성들이 실은 저평가된 ‘호감 구혼자’라는 설정을 입힌 이 프로그램에서 공식적인 호구는 개그맨 허경환, 박성광, 양세찬, 배우 김민규, 가수 동우로 구성된 5명의 남성 출연자들이다.

이들 옆에는 MC 장도연이 “세상 미녀들을 다 갖다 놓으셨네”라고 할 만큼 미모의 일반인 여성 4명이 짝을 이룬다. 평균 연령도 여성 쪽이 현저히 낮다. 이에 반해 출연자 중 최고령(40세)인 허경환이 자신과 김민규의 외모를 다른 남성 출연자와 구분 지을 정도로, 이들 ‘호감 구혼자’가 전체적으로 미남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물론 한 인간의 매력과 호감도를 결정짓는 게 외모와 젊음만은 아니다.

경향신문

MBC 새 예능프로그램 <호구의 연애>의 남성 출연자 5명은 ‘호감 구혼자’라는 설정과 함께 현저히 낮은 연령대 미모의 여성들과 짝을 이룬다. ‘훈남’부터 ‘뇌섹남’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에게 붙는 수식어는 연예계에서 남성에게 유독 관대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MBC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외모에 대한 관대함이 남성 출연자들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이다. 기준을 알 수 없는 ‘호감 구혼자’라는 주입식 표현과 함께. 이것은 방송사가 억지로 만든 신조어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남성을 띄워주는 이름에도 계보는 있다. 그 계보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보는 것은 외모지상주의 연예계에서조차 적용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책 제목을 인용하자면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훈남’의 탄생, 문제의 시작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인식되는 ‘훈남’ 역시 신조어였던 시절이 있다. ‘훈남’의 대표자로 축구선수 박지성이 언급될 때만 해도 ‘미남’으로 분류될 수 없지만 그 이상의 강력한 장점과 매력으로 여성 팬덤을 만든 이들만 ‘훈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언론에서 처음 언급된 2006년 6월 말 ‘꽃미남 지고 훈남이 뜬다. 못생겨도 여심 두근두근’이란 기사에선 이미 그 ‘훈남’ 개념의 활용은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다. 굳이 제목에 ‘꽃미남 지고’라고 단서를 단 것처럼, ‘훈남’은 ‘미남’의 여집합을 수식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잘생김을 상회하는 매력이 훈훈한 게 아니라, 그냥 잘생기지 않은 남성 일반이 훈훈한 게 됐다. 같은 해 7월28일, ‘<한반도>의 강신일, 최고 훈남으로 떠오르다’라는 기사에선 “강신일의 훈남 열풍”이라는 표현을 썼다. 약 한 달 뒤, 대중문화전문기자 배국남은 당시 인기를 끌던 드라마 남배우들을 따뜻한 느낌의 미남 ‘온미’, 까칠한 미남 ‘칼미’, 그리고 따스한 마음의 ‘훈남’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당시 ‘온미’로 인용된 건 다니엘 헤니, ‘칼미’는 현빈, ‘훈남’은 이문식이었다. ‘훈남’ 개념의 등장과 함께 한국 평균 외모 남성들은 너무 쉽게 훈훈하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그해 겨울, 당시 한나라당 대권 주자 빅 3의 새 애칭이 공개됐고, 이 중 이명박의 별명이 ‘훈남’이었다.

■‘볼매남’, 굳이 또 봐야 할까요

‘볼수록 매력 있는 남자’의 줄임말로서의 ‘볼매남’은 2007년,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등장했다. 가령 MBC 시트콤 <김치 치즈 스마일>에서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한 엄기준에 대해서, 배우 하유미가 동료인 김상중의 엉뚱한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볼매남’이란 표현이 나왔다. 적어도 여기까진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 매력을 뜻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2010년 이전까진 활용 빈도도 매우 적다. 하지만 ‘훈남’의 훈훈함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주관적 기준이라는 점에서 곧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2010년 말,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공개한 전현무에 대한 기사는 “우월 스펙에 ‘훈남’ 어린 시절까지 갖춘 ‘볼매남’”이라는 누리꾼 의견을 전했다. ‘훈남’과 ‘볼매남’이 쉽게 한 사람을 수식할 수 있다는 건, 그냥 누구나 쉽게 ‘훈남’과 ‘볼매남’이 될 수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사실 볼수록 매력 있다는 걸 강조하는 건, 한 번에 매력적인 외형이 아니어도 정들 때까지 자주 봐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에 가까워 보인다. 2011년 7월 김범수 콘서트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서는 “‘볼매남’에 빠져볼까”라는 표현을 썼다. 그냥 안 보고, 그토록 김범수의 아름다운 목소리에만 집중해도 되지 않았을까.

남성에 대한 수식어가 ‘미남’ 아닌 남성에 대한 미의 기준을

다양화하고 외연을 넓히기 위해 등장했다면,

여성에 대한 수식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잣대는 그대로 둔 채

그 안에서 여성을 세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남성에게 관대한 기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여성을 호구로 삼아 그러한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주입하는

문화적 사회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땀 흘리면 그냥 다 ‘짐승남’

‘훈남’과 ‘볼매남’ 개념이 얼굴 외의 요소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처럼, 짐승남은 얼굴보단 ‘몸’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못생겼지만 몸이 좋은 남자를 뜻하는 표현은 아니었다. 2009년 중반 이후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남자 아이돌 2PM을 수식하던 ‘짐승돌’이라는 표현이 ‘짐승남’이라는 표현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언론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건 7월 초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전작 <300>을 ‘짐승남’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라 언급한 것. 하지만 2PM과 제라드 버틀러에 한정되면 좋았을 ‘짐승남’도 ‘훈남’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오남용되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말 KBS <천하무적 토요일> ‘천하무적 야구단’에 대해 ‘‘천하무적 야구단’, 그 매력적인 짐승남들’이란 기사가 나왔다. 땀만 흘리면 ‘짐승남’이다. 그다음 달 SBS파워FM <최화정의 파워 타임>에 출연한 가수 박효신은 자신을 ‘초식남’이라 칭하면서 함께 출연한 친구 김태우를 ‘짐승남’이라 칭했다. 수염 기르고 덩치가 크면 ‘짐승남’이다. 그리고 2010년 1월, 새해 주요 뉴스로 유해진, 김혜수 연애 소식을 다룬 기사에선 “유해진은 개봉된 영화 <전우치>에서 암캐로 분해 짐승남의 전형으로 팬들의 호감을 급상승시키고 있다. 일과 사랑에서 짐승남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다”고 평했다. 몸이 좋은 남성을 말하던 ‘짐승남’이란 이름은 그냥 몸이 있는 남성 모두에게 허용됐다.

■뇌를 꺼내 확인해볼 수도 없는 ‘뇌섹남’

얼굴 외의 장점을 부각하는 꾸준한 흐름 안에서 성격, 개성, 몸에 이어 필연적으로 남성의 지성을 강조하는 신조어 ‘뇌섹남’이 등장했다. 해당 표현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낸시 랭은 2013년 방송에서 “연기할 때마다 눈빛이 바뀌는 모습과 열정적인 모습”을 이유로 박유천을 ‘뇌가 섹시한 남자’로 꼽았다. 처음부터 기준이 제멋대로였다는 뜻이다. 물론 비슷한 시기, 허지웅, 유희열, 타일러 라쉬 등 일정 이상의 지식과 언변을 갖춘 남성 방송인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뇌섹남’ 개념이 유행하긴 했지만, 이후 나영석 PD, 장기하, 전현무처럼 학력을 포함한 일정 이상의 스펙을 지닌 남성 모두에게 ‘뇌섹남’의 은총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KBS <해피투게더 3>에 출연한 송재림이 자기계발의 연장선에서 취미로 수영과 색소폰, 오토바이를 즐긴다고 말하자 ‘<해피투게더 3> 송재림, 이 정도 취미면 뇌섹남?’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KBS 드라마 <그녀를 찾아줘>의 캐릭터 소개에선 “와플 가게에서 주문한 와플이 벨기에식이 아닌 포르투갈식인 것을 알 정도로 지식이 많은 뇌섹남” 같은 설명이 붙었다. 최종적으로 몸이 있으면 ‘짐승남’이 됐듯, 뇌와 도구를 쓸 줄 아는 남자는 다 ‘뇌섹남’이 됐다. 문제는 이것을 정말로 섹시함이라고 믿는 남성들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언론에 의해 ‘원조 뇌섹남’이라고 강제 지목된 문화평론가 김갑수는 “여성 입장에서 지성을 갖춘 남자가 자신을 논리적으로 압도한다면 그런 남자가 매혹적인 남자”라고 자기애 넘치는 발언을 하더니, 나중엔 책 <작업 인문학>에서 록 스피릿과 밥 딜런을 이야기해 여성을 유혹하는 법에 대해 강론했다. ‘뇌섹남’ 열풍은 남성들이 뇌의 근육을 단련하는 대신 자의식의 뱃살만 찌우는 계기가 됐다.

■‘훈녀’, ‘볼매녀’도 있지 않나요?

같은 방식으로 여성에 대한 매력 기준 역시 넓어지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훈녀’ ‘볼매녀’ ‘뇌섹녀’ 등의 이름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장 기사 검색에서 ‘훈남’으로는 16만8000여개의 기사가, ‘훈녀’라는 키워드로는 그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1만600건 정도의 기사가 나온다. 즉 훈훈함이라는 개념이 남성들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부여됐다. 또한 앞서 말했듯 ‘훈남’이 꽃미남의 여집합으로 설정되어 잘생기지 않은 남성들의 매력을 상향 조정해주는 역할을 했다면, ‘훈녀’는 거의 대부분 과거에도 ‘미녀’로 분류되던 여성들을 수식한다. 마찬가지로 ‘볼매남’에 대한 초기 기사가 의외의 매력을 강조한 것에 반해 ‘볼매녀’에 대한 초기 기사는 그라비아 화보처럼 여성의 몸매를 강조하거나 좋은 피부를 강조했다. 거칠게 요약해 남성에 대한 수식어가 ‘미남’ 아닌 남성에 대한 미의 기준을 다양화하고 외연을 넓히기 위해 등장했다면, 여성에 대한 수식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미적 기준은 그대로 둔 채 그 기준 안에서 여성을 세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경향신문

위근우 칼럼니스트


남성에게 유독 관대한 기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은연중 강요한다는 것은, 여성을 호구로 삼아 그러한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주입하는 문화적 사회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대중문화에서 남성을 수식하는 표현은 매력적인 남성의 기준을 대폭 완화해주고 여성 소비자들에게 관대함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분명 외모지상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더 다양한 외모와 개성이 긍정되고 더 자주 방송을 통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좋은 방향이 맞다. 하지만 그것이 한 성별에만 유독 관대하게 허락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선해 해줄 이유가 있을까. 아니, 불의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있을까. 정말, 여성을 호구로 보는 게 아닌 다음에야.

위근우 칼럼니스트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