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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서해는 한반도 정세의 바로미터였다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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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NLL(북방한계선), 1953년 정전협정 이후 긴장의 연속 / 서북도서와 서해 NLL, 北이 우위에 있는 유일한 지역 / 1973년부터 의도적 침범과 적대행위 지속 / 계속되는 北 도발에 軍, 첨단 무기 배치 / NLL, 논쟁과 갈등의 중심에 서기도 / 北, NLL 두고 자극적 언행 / 文 정부 출범 이후 긴장 크게 완화 / 지난 9월 남북 군사합의서에 ‘NLL 존중 및 준수’ 원칙 반영

세계일보

해군 유도탄고속함 서후원함이 40㎜ 함포를 발사하고 있다. 해군 제공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가장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생명을 걸어야 한다고 하면, 선뜻 나설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곳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이었다. 1990년대 이후 벌어진 남북 무력충돌과 군사회담은 대부분 서해 NLL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북한은 군사적 도발과 협상을 병행하는 화전양면 전술을 사용, 서해 NLL 무력화를 끈질기게 시도했다. 우리 군 장병들은 최전선과 군사회담장에서 북한 도발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 서해 NLL을 수호했다. 이들은 지난 22일로 4회째를 맞은 ‘서해수호의 날’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北, ‘NLL 도발’로 정세 주도권 장악 시도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남북간 군사적 대치는 팽팽하게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서북도서와 서해 NLL은 북한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북한은 황해도 일대에 배치된 병력과 장비를 동원, 서북도서와 서해 NLL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 수백문의 해안포와 고속정, 잠수함은 물론 내륙 지역 공군기지에 배치된 전투기까지 동원 가능하다. 반면 우리측은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해 NLL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수도권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해 NLL을 유지해야 하지만 북한의 군사적 우위 속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남한보다 열세였던 북한은 서해 NLL의 특성을 이용해 도발을 감행해왔다. 우리 군이 북한 도발에 맞서 서해 NLL 방어에 주력하면 북한은 군사분계선에서 도발을 감행,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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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해병대원이 K-9 자주포 밖으로 몸을 내민 채 상황을 살피고 있다. 해병대 제공


북한은 1973년부터 서해 NLL 일대에서 의도적인 침범과 적대행위를 지속했다. 북한이 서해 NLL에서 군사적 행동을 취할 때마다 이 일대에서는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일어났다. 우리 군은 감시 및 초계활동과 해상군사훈련 등을 통해 서해 NLL 이남 해역을 실질적으로 통제했으며, NLL을 침범하는 북한 함정이나 어선은 NLL 이북으로 퇴거시켰다. 제1연평해전(1999년)과 우리측 장병 6명이 전사한 제2연평해전(2002년)은 서해 NLL을 둘러싼 남북간 긴장이 교전으로 번진 사례다.

우리측의 해군력 강화로 함정을 이용한 도발이 한계에 부딪히자 북한은 잠수함과 해안포를 동원, 대남 압박을 강화했다. 2010년 3월 백령도 근해를 순찰하던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이 발사한 어뢰에 피격, 침몰됐다.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승조원 46명이 전사했고, 구조 과정에서 한주호 해군 준위가 순직했다. 같은해 11월 북한은 연평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감행, 해병대 장병 2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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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서해 해상 적대행위 금지구역(완충수역) 합의 시행을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 31일 오후 인천 옹진군 연평면 망향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장재도의 포진지가 닫혀 있다. 연평도=연합뉴스


일련의 도발이 이어지면서 우리 군은 서북도서에 공격헬기와 스파이크 대전차미사일 등 첨단 무기를 배치했다. 또한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위한 지휘체계를 구축했다.

이에 북한은 군사분계선으로 눈을 돌렸다. 2015년 8월 4일 경기 파주 우리측 비무장지대(DMZ)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 우리 군 부사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군 합동조사단은 8월 10일 지뢰 폭발 사고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북한은 같은달 20일 경기 연천 일대 대북확성기를 향해 포격을 감행, 한반도를 전쟁 직전 수준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NLL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군사적 도발을 중단했다. 지난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등을 명시한 군사합의서를 채택하면서 NLL과 군사분계선에서의 긴장은 크게 완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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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상 적대행위 금지구역(완충수역)에 관한 9.19 남북군사합의가 시행된 첫날인 지난해 11월 1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 인근 해안에서 기동훈련중인 고속정의 포신에 덮개가 씌워져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회담장으로 옮겨간 NLL 충돌

북한의 도발로 인한 거듭된 무력충돌은 국민들에게 NLL을 반드시 지켜야 할 영토선처럼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무력충돌 직후 남북관계가 얼어붙는 상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군사회담을 통해 NLL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이후 남북 군사회담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NLL을 놓고 보수층과 진보층간에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면서 정치적 문제로 확대되기도 했다.

북한은 NLL에 대한 우리 내부의 상반된 인식을 이용, 군사회담을 통한 NLL 무력화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기존 견해를 뒤집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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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06년 5월 판문점에서 열린 제4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에서 북한측 수석대표였던 김영철은 “NLL에 대해 우리(북한)는 합의도, 승인도, 묵인도 해준 적이 없으며 1973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NLL이 무효임을 선언했다”고 주장했다. 우리측이 북한 스스로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한 1959년판 조선중앙연감에 대해 언급하자 “해당 출판사가 표기를 잘못해 인민들의 항의를 받아 없어졌으며, 3개월만에 도표를 모두 찢어버렸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어 새로운 해상분계선 설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해상분계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 회담은 열릴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김영철은 이후 5, 6차 회담에서도 사실 왜곡과 자극적인 언행, 협박, 언론공개를 통한 정치선전, 고의적인 회담 지연 등을 통해 우리측을 압박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는 우리측이 ‘NLL 존중 및 준수’ 원칙을 고수한 데 따른 결과라는 평가다. 2000년 이후 열린 남북 군사회담에서 우리측은 남북이 관할해온 해역과 NLL을 존중하면서 1992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를 기반으로 서해 우발적 충돌방지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같은 원칙은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군사합의서에도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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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1함대 참수리 고속정 장병들이 지난해 1월 30일 강원 강릉시 인근 해상에서 경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해군 1함대 제공


북한의 반복되는 도발에도 서해 NLL 일대에서 평화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NLL 수호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다. 장병들이 서북도서와 NLL을 굳건히 수호하면서 우리 정부가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는 동안 판문점에서는 북한의 몽니에도 흔들리지 않고 협상을 진행했던 군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NLL은 오래 전에 지도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서해와 판문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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