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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여순사건 사형 71년 뒤…대법원 “다시 재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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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뒤 22일 만에 사형된 3명

“민간인 내란혐의 무차별 체포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 부합”

일각 “새로운 증거 없이 재심”

대법원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사형을 선고받고 사망한 피고인들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여순사건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 재심을 확정한 첫 사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내란 및 국권문란 혐의로 사형 선고돼 집행된 장모씨 등 3명의 재심 인용 결정에 대한 재항고 사건에서 재심 개시를 결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의 대법관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재판에서 주심 김재형 대법관이 쓴 다수의견에 9명의 대법관이 함께했다. 이에 따라 장씨 등에 대한 재심은 재판부가 정해지는 대로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반란군에 점령됐던 전남 여수와 순천을 탈환한 국군은 수백 명에 달하는 민간인에게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린 뒤 곧바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재판부는 “당시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에 대한 체포·감금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이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장씨 등은 당시 국군이 반란군으로부터 순천을 탈환한 직후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형이 집행됐다. 당시 이들이 어떤 절차를 통해 수사를 받았는지, 재판 과정에서 입증된 증거는 무엇이었는지 등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후 2007~2008년 여순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군·경이 순천 지역 민간인 438명을 내란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사형을 집행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장씨 유족 등은 “군·경이 구속영장 없이 불법 체포·감금해 유죄 판결이 나왔기에 재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심 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내용과 증거 요지가 없고 순천 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을 보면 장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검찰이 “유족의 주장과 역사적 정황만으로 불법 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곧바로 항고했지만 2심 재판부 역시 “불법으로 체포·구속됐다”며 1심 결정을 옳다고 봤다.

“여순사건 재심, 국가 책임 보여준 결정” “법원, 역사 문제를 정치적 접근”

검찰은 대법원에 재항고했지만 대법원 역시 다수의견으로 재심 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대법관 4명은 판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재심이 어렵다는 취지의 반대 의견을 냈다.

조희대·이동원 대법관은 “형사소송법은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직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재심 사유로 규정하되 그 증명 방법을 확정판결만으로 제한했다”며 “이 사건에서 재심 사유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박상옥·이기택 대법관은 “이 사건 재판이 실제로 있었는지, 장씨 등이 사형 판결의 집행으로 사망한 것이 사실인지 의문”이라며 “판결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공소사실을 알 수 없는 이상 재심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날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대해 지역사회에선 환영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은 “여순사건의 국가 폭력에 대한 책임을 보여준 판결”이라며 “번번이 무산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대법원의 결정으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재심 청구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법무법인 민주 서정욱 변호사는 “재심 결정은 명백한 증거가 새로 나와야 가능한데 판결문이 없다는 이유로 재심할 순 없다”며 “법원이 역사에 맡길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정·이병준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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