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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섹시함 강요 “NO” 당당한 외모 “YES”…걸그룹 ‘탈코르셋’ 확산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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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테니스 치마·높은 구두 벗고 긴 바지 정장·운동화 신은 채 공연

드림캐쳐·CLC·마마무 등이 주도

팬들 “예쁜 콘셉트 포기에 감탄” ‘K팝 특성상 일관성엔 한계’ 지적도

경향신문

구두를 벗어던진 채 공연을 펼친 걸그룹 드림캐쳐, 화장과 하이힐을 거부하는 가사를 담은 곡 ‘NO’를 공연하고 있는 걸그룹 CLC,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걸그룹 마마무(왼쪽 사진부터). 이들의 모습에서 최근 K팝 아이돌그룹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탈코르셋’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SBS MTV 화면 갈무리·연합뉴스·MBC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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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립 No, 귀걸이 No, 하이힐 No, 핸드백 NO!”

‘탈코르셋’(여성에게 강요되는 외모 잣대에서 벗어나자는 페미니즘 운동)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구호가 아니다. 지난 1월 걸그룹 CLC가 발표한 미니 8집 ‘No.1(노원)’의 타이틀곡 ‘NO’는 이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최근 컴백한 걸그룹 마마무는 지난 16일 MBC <음악중심>에 출연해 ‘쟤가 걔야’를 부르는 무대에 트레이닝복과 맨투맨 티셔츠, 운동화 차림으로 올랐다. 지난 2월 컴백한 걸그룹 이달의 소녀 역시 타이틀곡 ‘버터플라이(Butterfly)’ 공연마다 이전에 주로 입던 짧은 테니스 치마 대신 긴 바지 정장을 입고 무표정으로 군무를 펼친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는 다양한 체형과 스타일을 가진 다국적·인종 소녀들의 모습이 등장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걸그룹이 변하고 있다. 짧은 치마, 높은 구두, 짙은 화장 등 지금껏 K팝 여성 아이돌 가수들에게 당연히 기대되던 일정한 외모상에서 벗어나려는, 이른바 탈코르셋의 움직임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가수 정준영이 동료 가수들과의 채팅방에서 불법촬영 동영상을 공유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대화를 주고받은 의혹이 제기된 이후 K팝 아이돌 산업 전반에 대한 신뢰를 잃고 ‘탈덕’(팬 활동을 그만두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10대, 20대 여성 소비자들에게 K팝이 나아가야 할 긍정적인 지향점으로 읽히고 있다.

평소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던 고등학생 김가영양(18)은 최근 걸그룹 드림캐쳐의 팬이 됐다. 지난달 22일 SBS mTV <더쇼>에 출연한 드림캐쳐가 비방송용 무대에서 구두를 벗어던진 채 안무하는 영상을 접한 이후다. 김양은 “많은 걸그룹들이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높은 힐을 신고 공연을 많이 하는데, 드림캐쳐가 무대 위에서 구두를 벗어던진 채 편안하게 공연에 임하는 것을 보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 같아 기뻤다”고 말했다.

마마무의 팬 최모씨(24) 역시 “지금까지 성적으로 어필하는 데 집중해왔던 많은 걸그룹들의 복장이 이를 지켜보는 많은 여성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쳐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마무 역시 걸그룹으로서 예쁘고 잘 팔리는 콘셉트를 포기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과감히 트레이닝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용기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판타지’에 가까운,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보여주면서 일반 여성들에게도 ‘코르셋’이라 불리는 외모 기준을 은연중에 강요해온 K팝 아이돌 산업의 관습적 질서에 ‘NO’를 외치는 걸그룹의 모습에서 희망을 느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10대,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 ‘탈코르셋 운동’의 영향이 이들이 주된 소비층인 K팝 아이돌 산업에 미치며 걸그룹들의 탈코르셋으로도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을들의 당나귀 귀>를 출간한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최근 아이돌 소비시장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10·20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들이 보다 성평등하고 인권친화적인 모습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이를 업계가 반영해서 나타난 ‘마케터블 페미니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ㄱ걸그룹을 제작하고 있는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보통 걸그룹은 남성 팬들이 다수를 이룬다고 생각하지만, ㄱ걸그룹의 경우 여성 팬이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일부 여성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탈코르셋 코드 등이 일관성을 지니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예컨대 CLC의 경우 ‘NO’의 무대에서 가사와는 다르게 짙은 화장을 한 채 짧은 치마와 하이힐을 착용하고 무대를 꾸몄고, 마마무 역시 ‘쟤가 걔야’가 수록된 미니앨범의 타이틀곡 ‘고고베베’ 무대에서는 화려하게 꾸민 ‘전형적 걸그룹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과거 마마무의 팬이었다는 김모양(18)은 “마마무가 보여주는 편안한 모습을 좋아했지만 점점 사회적으로 답습된 성적대상화를 반복하는 ‘섹시한 의상’을 계속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아름답고 이상적인 외관을 보여주는 것에 방점이 찍힌 K팝 아이돌 산업에서 걸그룹이 페미니즘 운동에 부응하는 탈코르셋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논란까지도 유의미한 변화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 아이돌 문화에서 이 같은 변화의 기류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4~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라면서 “지금은 여러 의견이 충돌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이러한 논의가 계속된다면 아이돌 제작자와 소비자 모두 변화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걸그룹의 꾸밈에 대한 문제제기가 결국에는 여성 아이돌이 처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손희정 평론가는 “소비자로서 팬덤이 여성 아이돌의 노동조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나갈 때 걸그룹을 둘러싼 억압적인 환경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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