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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아침햇발] 개혁 숙제 ‘카드 긁기’ / 김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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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배
논설위원


미국의 사업가 프랭크 맥나마라는 1949년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지갑을 호텔 방에 두고 왔던 탓이다. 다른 이들도 자주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에 착안한 맥나마라는 당장 계산하지 않고도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카드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뿌렸다. 뉴욕 14개 레스토랑에서 카드만 보여주고 결제는 월말에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계 첫 신용카드 ‘다이너스 클럽’에 저녁(디너)이라는 뜻이 담긴 사연이다.

국내 첫 신용카드는 1978년에 발급된 외환은행의 ‘비자카드’였고, 1999년 소득공제 혜택을 줌에 따라 신용카드의 이용 범위는 전방위로 넓어졌다. 지금은 1천원짜리 생수 한병을 사면서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현실에 이르렀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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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 방침을 밝혔다가 되물리기까지 걸린 시일은 꼭 열흘이었다. 쉽게 관철할 수 있을 과제는 아닐 거라 봤지만, 그렇게 쉽게 집어넣은 것은 예상 밖이었다. 20년에 거쳐 여덟번이나 연장된 일몰(기한 만료) 시한은 올해 말로 잡혀 있고, 세제개편안 제출 시점도 다섯달가량 남아 있으니 논란을 벌여가며 실상이라도 제대로 알릴 법하다는 기대마저 무산됐다. 경제적 모임(4일 ‘납세자의 날’ 기념식)에서 나왔다가 정치적 회합(13일 당·정·청 협의회)에서 도로 들어간 것은 상징적이다. 새로 정해져 연장된 일몰 시한 2022년 말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만료 뒤다.

카드 공제 혜택을 끊는 게 정부·여당 처지에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긴 하다. 세제나 경제 논리를 들어 함부로 비난하기 어렵다. 공제 혜택을 입는 이들이 1천만명에 가깝다.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는 터에 두려움을 안겨줄 만한 숫자다. 더구나 받을 때의 ‘수학적 고마움’보다 뺏길 때의 ‘심리학적 고통’이 더 큰 법이다.

문제는 끊기로 한 공제 혜택을 자꾸 미루는 게 신용카드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올해 ‘조세지출(조세감면) 기본계획’에서, 지난해 일몰에 이른 비과세·감면 제도 89개 가운데 폐지나 재설계된 것은 13개로 15%에 그쳤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30%), 2016년(32%)보다 낮다는 대목에선 난감해진다. 올해 예상되는 조세감면액이 전체 국세수입 총액의 13.9%로 법상 한도(13.5%)를 넘어선다는 대목도 예사롭지 않다.

선거를 한해 앞두고 있다는 사정으로 다 양해될 일일까. 그렇게 본다면 선거를 앞두지 않은 때가 있기는 한지 의문이다. 총선 치르고 나면 대선 다가오고, 지방선거도 치러야 하니 선거를 앞두지 않은 시절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 셈법으로도 꼭 이로운지 따져볼 일이다. 1천만명 근로소득자의 표를 의식하는 건 합리적이라 치더라도 막상 선거에 닥쳐 ‘도대체 그동안 한 게 뭐냐’는 질문에 답이 궁색해지는 처지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포용국가’를 지향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재원이 필요하고 그 돈은 증세나 비과세·감면 정비를 통한 세수입으로 마련하는 것 말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상의 감세 정책이 현 정부가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신용카드 소득공제만 해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쪽에 더 유리하다는 건 상식이다. 신용카드 소득공제뿐 아니라 다른 비과세·감면 또한 부유층에 혜택을 더 안겨주는 역진성을 띠고 있어 서민지원책이라 볼 수 없다.

비과세·감면 미루기라는 ‘침소’를 문재인 정부의 개혁성 실종이라며 ‘봉대’로 키우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카드를 긁었다면 언젠가 결제를 해야 하듯 개혁 정책을 내걸었다면 그에 합당한 준비로 진정성을 증명해야 마땅하다. 맥나마라가 저녁 식사만 즐기고 월말에 밥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신용카드는 널리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세제개편 시일을 많이 앞두고 있으니 아주 물 건너갔다고 할 순 없다. 아직 기회는 있다. 국회 문턱에서 넘어지는 건 나중 일이다. 개혁 숙제를 기억하고 챙겼다는 흔적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는가.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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