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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진호의 세계읽기]볼턴의 노란 봉투는 과연 ‘항복 문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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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호찌민 영묘에서 화환증정식을 기다리고 있다. 하노이 |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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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준비·협상태세 엉성해

하노이 ‘외양적 패자’는 북한

더 중요한 건 회담 각본 작가가

김정은서 트럼프로 바뀐 사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볼턴의 노란 봉투에 든 내용과

김 위원장이 내릴 고뇌의 결론

벼랑 끝 외교 벌일지도 주목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노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지 보름이 지났다. 어느 정도 먼지가 가라앉을 시간이 됐건만 이 경우엔 아닌 것 같다. 시야가 뿌옇다.

‘과연 하노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에 쏠렸던 관심의 초점은 ‘과연 평양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을까’로 이동했다. 실체가 보이지 않으니 ‘이미지’가 크게 보이는 것일까. 지난주부터 언론은 평안남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서해 미사일 발사장)과 평양 산음동 미사일 종합연구단지의 위성사진들을 일제히 보도했다. 특히 동창리의 움직임을 미사일 발사 준비로 보는 분석이 많았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조립·생산시설인 산음동 연구단지에서 차량의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국가정보원의 국회 정보위 보고도 함께 제시됐다. 아직까지 두 곳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와중에 트럼프 팀의 치어리더로 변신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담 뒤 폭스뉴스를 비롯한 미국 주요 언론을 돌며 “하노이 회담은 실패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 엉성한 협상 태세의 예고된 실패

하노이 회담의 전모는 파악할 길이 없다. 주로 미 고위당국자들이 내놓는 말의 파편만으론 복원이 어렵기 때문이다. 합의문을 도출하지 못한 만큼 어느 쪽도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드러난 외양만 놓고 보면 북한의 실패다. 사전 준비와 협상장에서의 태세가 모두 엉성했다. 그 하이라이트가 ‘영변 핵시설’을 둘러싼 애매함 또는 방관이었다.

미국 측 회견을 들여다보면 북측은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던 순간까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영변 내 모든 시설’이라는 답을 듣고 이를 미국 측에 전달하기 위해 달려야 했다.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는 새로운 제안이 아니었다. 작년 9월 남북 정상의 평양공동선언 5조 2항에 명시됐다. 그 이후 영변 핵시설의 범위 및 내용에 대한 내부 정의조차 하지 않았음이 드러난 꼴이다.

2월 초 평양 실무회담에 참석한 양측 대표단은 숫자부터 달랐다. 북측은 회담 대표가 달랑 4명이었던 반면 미측은 15~16명이었다. 핵 전문가는 물론 미사일 및 국제법 전문가들을 망라했다. 광범위한 비핵화의 정의에 대해 북·미가 이견을 보이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다. 논의가 필요하다. ‘볼턴의 노란 봉투’에 담겼다는 핵·미사일·생화학무기 등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폐기안은 한쪽의 제안일 뿐이다. 하지만 ‘최고 존엄’이 5개월 전 수결한 합의 내용조차 준비를 안 했다면, 상대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미국 측은 ‘3평방마일 내 300여개 시설’을 파악하고 회담장에 들어갔다. 북측 내부의 의사소통이 없었거나, 영변 핵시설조차 통째로 내놓지 않겠다는 사전 고려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영변 핵시설의 정의 또는 광범위한 비핵화의 정의를 둘러싼 북·미 간의 오해 또는 이견은 향후 협상의 진전을 위해 우선 매듭지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하노이 대좌가 남긴 더 큰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각본의 주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작년 1월 이후 지금까지 진행된 4차례의 북·중 정상회담과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은 대부분 김정은 위원장의 각본에 의해 진행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담 상대를 정했고, 준비한 제안을 내놓았다.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안’은 그 일부일 뿐이다. 우선 남측과의 공동선언으로 내놓은 다음 미국 측에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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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열린 지난 10일 평양시내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하노이 북·미 회담 뒤 북한 내부의 변화는 두 가지다. 정권 창립 이후 처음으로 북한 최고지도자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입후보하지 않았다. 또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성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평양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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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본(playbook)의 저자가 바뀌었다

멀리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북핵을 둘러싼 외교 드라마는 많은 경우 북한이 설정한 일정과 각본에 따라 진행됐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과 같은 용어까지 북한이 만든 것들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하노이 회담장에서 평양의 각본이 아닌, 워싱턴의 각본을 내밀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비핵화의 정의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선(先) 핵포기’ 요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같은 제안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놓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밝은 미래가 있다는 말 역시 새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어떤 미국 대통령도 몸짓언어와 동영상까지 총동원해서 북한 지도자에게 직접 전달하지는 않았다. 작년 6·12 싱가포르 대좌에서 트럼프는 아이패드로 ‘북한의 기회 이야기(A Story of Opportunity for North Korea)’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김 위원장에게 보여주었다. 동영상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소수만이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아주 소수만이 자신들의 조국을 새롭게 하는, 역사의 경로를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면서 북한의 결단을 에둘러 권했다.

트럼프는 하노이 회담장에서도 몸짓언어를 아끼지 않았다. 김 위원장과 악수한 손등을 두들기거나 어깨를 치고, 귀엣말을 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이는 정상회담의 정석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정상 간의 만남은 합의문의 조항을 둘러싼 기술적이고 건조한 대화만을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다. 서로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개인적 신뢰를 심어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70여년 동안 대립과 반목을 해온 북한과 미국의 역사에 없었던, 지도자 간 화학적 결합의 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회담 결렬 이후에도 서로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있는 것은 두 차례의 대면이 주는 효과이자, 북·미 회담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긍정적인 신호의 하나다. 미국은 여기에 여러 카드를 손에 쥐고 상대 카드를 읽으려는 종래 게임의 법칙을 이탈했다. 들고 있던 카드를 모두 내보였다.

북한이 종래의 각본으로 돌아가려면 북한의 교역과 금융은 물론 노동자 해외취업까지 막은 안보리 제재들을 이고 살아야 한다. 중국이 제재에 충실히 동참한다면 북한 사회와 경제가 견딜 수 있는 한계가 몇 달 안 남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당장 올여름이 고비라는 관측도 있다. 지난 2월27일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이 단독회담을 갖기 전 “서두를 생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합의를 하는 것”이라는 트럼프의 말에, 김 위원장이 “우리한테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데…”라면서 말끝을 흐린 이유일지도 모른다. 국제사회가 북한 산음동과 동창리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것은 익숙한 과거가 떠올라서일 게다. 바로 북한의 ‘벼랑끝 외교’다.

이는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결국은 자신들의 요구에 가깝게 협상을 유도하는 수단이었다. 북한 입장에서 벼랑끝 외교의 가장 큰 미덕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궁극의 목표였던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지금은 수단이 될 수 없다. 2017년 핵전쟁 직전까지 위기를 고조시킨 것처럼 위기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파국을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벼랑끝 외교의 피로가 가장 많이 쌓인 곳은 워싱턴이다. 민주·공화당이 정파별로 나뉘어 ‘한국정치식 싸움’을 벌이고 있는 워싱턴 정계가 한목소리로 “나쁜 합의보다는 노 딜(no deal)이 좋다”면서 하노이 결렬을 되레 반기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북한은 그 원인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북·미 합의 가능성이 낮아진다면 북한 역시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핵·ICBM 실험을 재개하지 않더라도 핵활동 및 성능 개선작업은 계속할 것이다. 하노이 결렬은 어쩌면 ‘진실의 순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미국이 전한 노란 봉투 안에 든 서류의 내용이다.

■ 올해 태양절이 기다려지는 까닭

트럼프는 2월28일 하노이 회견에서 “북한은 엄청난 잠재력,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트럼프의 ‘북한 비전’에는 부동산개발업자의 지문이 묻어난다. 한국은 물론, 러시아 극동과 중국 사이에 자리해 부러울 정도의 ‘지리적·지정학적·지경학적 위치’다. 북한이 세계로 돌아오는 결정만 하면 엄청난 이익을 제공해줄 입지조건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북한을 상대로 체제 유지의 사활이 걸린 핵무기 포기를 요구하면서 막연히 경제적 번영의 비전만 제시하지는 않았을 터. 볼턴이 밝히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2만여리의 장정’을 마치고 지난 5일 평양으로 귀환한 김 위원장은 노란 봉투에 담긴 요구와 제안을 통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국 측은 여러 차례 ‘빅(big)’을 강조하고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큰 합의(빅 딜), 큰 걸음(빅 스텝), 한입 크게 물기(빅 바이트), 큰 건(빅 샷) 등의 말을 내놓는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다른 모든 표현과 빅딜은 다르다. 주로 볼턴의 언론 인터뷰에서 강조되는 ‘빅딜’은 최종적인 의미이지만, 나머지 ‘빅’은 모두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노이 회견장에서 트럼프의 표현은 ‘조금 더 멀리’나 ‘더 크게’ 정도였다. 볼턴의 장광설처럼 한번에 모든 걸 해결하자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조금 더 멀리 가려 했는데 북한이 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익숙한 궤도’를 떠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더구나 ‘최고 존엄’이 아직 ‘인간 선언’을 하지 않은 북한이다. 지금은 고민의 결론을 기다릴 시간이지, 이미지 속의 ‘솥뚜껑’을 보고 놀랄 때는 아닌 것 같다. 다가오는 북한의 태양절(4월15일)은 무언가 변화의 단서를 포착하기 좋은 시점이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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