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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반민특위가 국론분열? 70년전 반대 데모 때 친일파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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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48년 정부수립 이후 5개월간 활동

독립운동 했던 인사들이 친일파 처벌 위해 참여

이승만, 반민특위 해체시위에서 직접 연설까지

나경원 국론분열 발언, 진의가 무엇인지 밝혀야

유럽은 친나치 청산, 인구 10만명당 몇백명씩

한국의 친일파 청산은 0명, 기네스북 오를 수준

CBS 시사자키 제작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15~19:55)
■ 방송일 : 2019년 3월 15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정관용> 오늘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반민특위가 계속해서 보입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이 반민특위, 국민분열 이런 언급이 있은 이후에 특히 또 젊은층에서는 반민특위가 뭐지 잘 모르는 분들도 많아서 검색을 많이 해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제대로 공부하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기획실장 나오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 방학진> 안녕하십니까? 방학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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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긴급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 정관용> 정확히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죠, 그렇죠? 언제 만들어졌고 언제까지 했습니까?

◆ 방학진> 1948년 9월에 만들어졌죠.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48년 8월 만들어졌으니까 그다음 달에 바로 만들어진 기구이고 실제 활동은 그 이듬해 1월부터 했는데 친일파들의 방해에 의해서 6월 6일날 사실상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거니까 정확히 말하면 냉철하게 얘기하면 5개월 정도 활동했다. 이렇게 봅니다.

◇ 정관용> 이게 만들어지기 위한 법적 근거가 있었겠죠?

◆ 방학진> 반민법인데요. 대한민국은 법률을 만들면 법률마다 번호를 붙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래서 법률 1호, 2호의 법률은 각각 정부조직법, 대통령사면법이거든요. 아주 기능적이고 실무적인 법이다라고 할 수 있고 바로 이 반민법이 법률 3호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당시 민중들의 의견, 이념, 요구를 반영한 첫 번째 법률이라 할 수 있죠.

◇ 정관용> 즉 일제 잔재 36년 식민통치에서 해방됐으니 친일 앞잡이들 잡아서 처벌합시다, 이거죠?

◆ 방학진> 너무나 당연한 거죠.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 도둑을 다음 날 잡았는데 그 도둑이 우리 집에서 무슨 물건을 훔쳐 갔는지 그 목록을 캐고 그 죄를 징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죠.

◇ 정관용> 어떤 분들이 참여한 겁니까?

◆ 방학진> 반민특위요? 반민특위는 자격요건에 평생 독립운동을 해야 되고 한 번도 변절하지 않은 그런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으로 아주 자격요건을 정해 놨습니다. 그래서 반민특위위원장이나 이런 분들은 평생을 독립운동한 분으로 모셨던 것이죠.

◇ 정관용> 그러니까 반민특위 특별위원회 위원들일 거고 그 밑에 산하 사람들 불러다 조사하고 하는 실무진들도 있을 거 아닙니까?

◆ 방학진> 실무조사관들 각 지방마다 지방조사관들을 뒀고요. 그것은 그 위원들의 보증이라든지, 인원보증, 어떤 검증절차를 통해서 괜찮은 분들로 이렇게 조사관들로 편성한 것이죠.

◇ 정관용> 그래서 실질적 활동은 49년 1월부터.

◆ 방학진> 1월 8일날 화신백화점 사장이었던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실질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 정관용> 그런 체포권한 같은 것도 있었군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반민특위라고 하는 것은 위원회는 조사를 하게 되고요. 특별검찰부라고 해서 지금처럼 기소를 하게 되고 또 특별재판부가 있어서 판결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기구고요. 그 당시에 특별재판부의 재판장이 바로 그 유명한 가인 김병호 선생이죠.

◇ 정관용> 그렇군요. 그래서 모두 몇 건 정도를 조사했고 몇 명을 체포했고 이런 자료가 있습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지금 기록으로는 한 688건 정도를 조사한 걸로 알고 있지만 실제 그거는 조사한 건수이고 그러면 그 해당 피의자들, 친일파들이 실질적으로 벌을 받았느냐라고 했을 때는 제로라고 할 수 있죠.

◇ 정관용> 한 명도 처벌이 없어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49년 6월에 반민특위가 친일파에 의해서 강제로 백주대낮에 위원회가 침탈당하고 9월 달에 반민법을 다시 법을 개정해서 위원회를 해산시켰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남아 있던 피의자들, 남아 있던 기소자들은 6. 25전쟁 과정에서 모두 무죄방면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제로인 거죠.

◇ 정관용> 그러면 우선 6월의 강제 침탈부터 설명해 주세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지금의 명동인데요. 명동에 가시면 롯데백화점이 있는데 그 건너편에 국민은행, 지금 국민은행이 옮겼습니다마는 국민은행 본점 자리가 바로 반민특위 자리가 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활동하던 당시였었는데 49년 6월 6일날 대낮에 주무경찰서에서 경찰들을 동원해서 활동하고 있던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특위 위원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거죠.

◇ 정관용> 경찰이?

◆ 방학진> 그렇습니다. 중부경찰서가. 바로 이승만의 지시가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그 당시의 반민특위라고 하는 것은 제헌의회가 만든 법적 헌법기구거든요. 헌법기관을 일개 중부경찰서 경찰관들이 침탈했다. 무기도 회수하고 서류도 가져가고 했다는 것은 대통령의 지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죠.

◇ 정관용> 경찰이 그렇게 할 때는 그래도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 방학진> 없습니다.

◇ 정관용> 아무 명분도 없이?

◆ 방학진> 없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특별검찰부장. 바로 그 당시에 권승렬 검찰총장도 그 경찰에 의해서 무장해제가 될 정도니까. 무소불위, 백주대낮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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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용>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싫어했어요?

◆ 방학진> 반민특위를 너무나 싫어했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그다음 날 48년 9월 23일날 반민특위를 없애자고 한 대회에 나와서 축사도 하시고. 대놓고 싫어하셨죠.

◇ 정관용> 아니, 제헌의회가 만든 제3호 법안인데. 정부조직법 다음인데 본인은 어쨌든 제헌의회에 의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잖아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어떤 근거를 가지고 반민특위 해체 시위에 와서 연설을 했나요?

◆ 방학진> 축사를 하셨는데 그 축사뿐만이 아니라.

◇ 정관용> 그러니까 논리가 어떤 거였습니까? 왜 안 된다는 거예요?

◆ 방학진> 이들이 국가의 기간을 맡을 사람들인데 주로 말하면 친일경찰들이겠죠. 국가의 기간, 국가의 심부름꾼, 일꾼들이 될 사람을 과거의 그 행적을 가지고 다 감옥으로 보내면 대한민국은 누가 운영하느냐라는 그런 논리죠.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보통 의회주의자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역할을 하신 거죠, 그 당시에는.

◇ 정관용> 그러니까 친일, 일제시대 때 관료로 있던 경찰이나 이런 관료로 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을 계속 우리가 써야 된다? 그 얘기군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정관용> 국민들은 싫어하는데?

◆ 방학진> 그 당시에 그 당시의 서울신문. 지금도 서울신문이지만 그 당시 서울신문에서 하도 그런 문제들, 일제시대의 친일경찰이 해방 이후에도 경찰을 하고 있고 그 당시에 고위급들 80%가 친일 경찰이고 서울시내 10개 경찰서 중에 9명이 친일 경찰, 1명인데 그 1명은 일제시대 군수입니다. 그러니까 서울시내 10개 모든 경찰서장이 일제시대 관료인 상황에서 많은 국민들이 항의를 했죠. 그런 것들이 이제 서울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는데 그렇지만 그거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일파 중용을 계속 강행한 것이죠.

◇ 정관용>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혼자만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시위까지 벌어졌다면, 반민특위 없애라는 시위까지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 시위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뭐예요?

◆ 방학진> 이종영이라든지 주요한 친일파들인 것이고 반민특위 때문에 반민특위가 활동을 제대로 한다면 본인들이 바로 반민특위에 처벌이 될 사람들이죠.

◇ 정관용> 잡혀갈 사람들.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 사람들이 나서서 시위하는데 현직 대통령이 가서 축사를 한다?

◆ 방학진> 국무총리도 역시 축사를 하고.

◇ 정관용> 그런 행동에 대해서 반민특위는 입장을 안 밝혔었나요?

◆ 방학진> 반민특위가 여러 차례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얘기했고. 그다음에 그 당시 위원장이던 김상덕 위원장이 여러 차례 정부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위원회는 제헌의회가 만든 합법적인 기구기 때문에 위원회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 여러 차례 입장을 발표하셨죠.

◇ 정관용> 그렇게 해서 49년 6월 6일날 강제침탈 그것도 경찰에 의해서. 서류니 뭐니 다 뺏어가고.

◆ 방학진> 그렇게 되고 그다음 단계는 6월 23일날 같은 달 6월 23일날 국회 프락치 사건이 있죠. 반민특위에 앞장섰던 김학수 부의장을 포함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김일성의 프락치다, 간첩이다라고 해서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옭아맨 거죠. 그다음에 그다음 주에 바로 6월 26일날 백범의 암살. 그래서 같은 6월달에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6월 23일 국회 프락치 사건, 6월 26일 백범 김구 암살이 학자들이 얘기하기에 친일파들의 6월 총공세라고 하고 그 6월 총공세에 의해서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파 청산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다. 이렇게 저희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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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의 반민특위는 법 제정 1년여 만에 활동을 마감했다. 반민특위 전남 조사부가 광주에 설치한 투서함에 자료를 넣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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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용> 바로 이런 역사적 근거 때문에 일제 잔재가 친일파 청산하자고 하는 그 운동을 빨갱이로 몰아서, 즉 김일성 프락치라고 하는 식의 논리로 몰아서 처단한 바로 이런 얘기들이 거기서 나온 거로군요.

◆ 방학진> 그 당시에 반민특위 반대하는 데모 때 나온 구호 중의 하나도 민족분열이 웬 말이냐 이런 게 또 나옵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했던 워딩과 똑같습니다. 왜 반민특위를 만들어서 민족 분열을 시키냐라고 하는 것이죠.

◇ 정관용> 반민특위를 만들어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을 분열시킨다?

◆ 방학진>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그 당시 70년 전 논리가 지금 70년 후에도 국회에서 그 논리가 횡행하고 있는 거죠.

◇ 정관용> 그래서 9월 달에 반민특위를 없애버리는 법이 새롭게.

◆ 방학진> 개정법이 개정안이 돼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법이 되고 반민특위가 되는 것이죠.

◇ 정관용> 반민특위 껍데기만 남았다는 얘기는 실질적 권한이나 이런 거 아무것도 없고?

◆ 방학진> 그렇습니다. 무죄방면 시키고 기소유예하고 보석하고 이런 거죠.

◇ 정관용> 그리고 그저 서류상으로라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까 한국전쟁.

◆ 방학진> 와중에 전원 법에 의해서 다시 무죄로 법적으로도 무죄로 만들어졌죠.

◇ 정관용> 그러면 진짜 제대로 활동 시작도 못 하고 그냥 끝나버린 셈이로군요.

◆ 방학진> 제가 반민특위의 와해를 보면서 세월호 1기, 1기 세월호가 많이 눈에 데자뷰가 되더라고요.

◇ 정관용> 조사위원회. 조사 거의 못했잖아요.

◆ 방학진> 못했지 않습니까? 진상도 못 밝히고. 그런 것이 많이 데자뷰가 되더라고요. 쉽게 말하면 70년 전에 과거 청산 못한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똑같이 올가미가 되어서 우리에게 오는 거다.

◇ 정관용> 그 후에 반민특위와 같은 것을 재건합시다라는 운동은 없었습니까?

◆ 방학진> 그게 반민특위를 하는 게 정부에 의해서 그다음에 의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기 때문에 의회가 그걸 해 줘야 되는데 어떻게 보면 그 의회가 지금도 그런 역할들을 못하고 있다고 봐야죠.

◇ 정관용> 언급하신 것 나경원 원내대표 어제는 조금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 이렇게 연결 바로 하더니 오늘 또 아침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프로그램에서 반민특위에 대해서 재차재차 물으니까 반민특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반민특위 활동이 제대로 됐어야 했다. 이후에 큰 국론 분열이 온 것처럼. 이런 표현을 써서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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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사진=시사자키 유튜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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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저도 그걸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요. 반민특위가 제대로 못 한 것이 바로 이승만과 친일세력이거든요.

◇ 정관용> 제대로 못 해서 국론분열이 왔다는 얘기인가요.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론분열이 왔다는 얘기인가요?

◆ 방학진> 그건 제가 한번 만나서 물어봐야겠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또 오늘 한국당 비상의원총회에서도 해방 이후 친일 청산 잘 됐어야 했고 반민특위 활동도 잘 됐어야 했다. 그리고서는 하지만 국론분열을 가져온 점이 있고. 이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이것도 해석이 참 어려워요.

◆ 방학진> 그렇다면 국론 분열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도, 살인범 이런 분들 안 잡아가야 하나요? 죄 있는 사람을 당연히 징치해야 되는 것이.

◇ 정관용> 이 문장이 잘 됐어야 했고 반민특위 활동도 잘 됐어야 했다. 잘 못 돼서 국론분열을 가져왔다는 표현인지. 그런데 왜 중간에 하지만이 들어가는지.

◆ 방학진> 그 본심은 알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여전히 어제의 반민특위가 분열의 씨앗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하고 싶었는데 여론이 비등하니까 살짝 비껴간 거 아닌가 싶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애매하군요, 표현도. 아주 뚜렷하게 하려면 반민특위가 제대로 못해서 우리나라가 국론분열이 지금까지 오고 있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건데. 아닙니까?

◆ 방학진> 그 주장을 왜 그렇게 굽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장을 굽힌 것 같지는 않지만 소나기는 피해가자, 이런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 반민특위가 프랑스에서처럼 제대로 활동했다면 지금같이 또 새삼 논란 자체가 없을 수 있는 거잖아요.

◆ 방학진> 그래서 제가 데이터를 가져왔는데요. 유럽이 나치 청산 잘 했지 않습니까? 프랑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프랑스보다 더 많은 나라들이 나치 청산을 잘 했는데요. 인구 10만 명당 친나치 부역자들 징용을 보낸 숫자가 프랑스가 94명인 데 반해 덴마크가 374명입니다. 네덜란드가 419명, 벨기에가 596명, 노르웨이가 633명입니다.

◇ 정관용> 인구 10만 명당.

◆ 방학진> 인구 10만 명 당.

◇ 정관용>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 방학진> 제로.

◇ 정관용> 제로.

◆ 방학진> 기네스북에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지금 거명한 유럽의 나라들이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과거 청산 잘했기 때문에 지금 현재 복지국가가 돼 있고.

◇ 정관용> 그리고 국론분열이 없잖아요.

◆ 방학진> 국론분열이 없고 사회통합이 잘 돼 있고. 이런 나라들이거든요.

◇ 정관용> 제3, 제4 진의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생겨서 국론분열이 있었다는 말인지 반민특위가 제대로 못해서 국론분열이 있다는 말인지 이건 분명히 답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정관용> 여기까지 오늘 반민특위에 대해서 공부를 해 봤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기획실장이었어요. 고맙습니다.

◆ 방학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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