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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신율의 정치 읽기] 남북경협 서두르기보단 美 신뢰 회복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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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북정상회담을 통해 미북 사이 핵심 쟁점이 ‘영변 플러스 알파’ 대 ‘제재 해제’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3월 4일 이렇게 말했다.

미북정상회담 이전에는 ‘미국이 영변 플러스 알파를 원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결렬 이후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변 플러스 알파’가 아닌 ‘그랜드 딜’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밝힌 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그러니까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 그리고 탄도미사일 폐기를 위한 대응 조치와 북한의 경제적 미래, 즉 이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이 나열돼 있는 문서를 건네며 ‘통 큰 협상’을 하자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플랜B가 없었던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제안에 상당히 당황해했다고.

트럼프 대통령 제안에 대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 핵심 참모진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참모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딜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요구한 것이 볼턴 보좌관 주장처럼 그랜드 딜이었는지, 아니면 강경화 장관 말처럼 영변 플러스 알파였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첫 번째 의문이다. 볼턴 보좌관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트럼프 대통령은 참모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딜을 밀어붙였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두 번째 의문인 트럼프 대통령이 왜 그랜드 딜을 밀어붙였는가부터 생각해보자. 이 의문이 풀리면 첫 번째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다.

우리나라 언론은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몰릴수록 북한과의 평화 도출을 서두를 것이라 예상했다. 사실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이유는 이렇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율 여론조사는 2차 대전 이후, 1953년에 취임한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시절부터 실시됐다. 아이젠하워 이후 미국 역대 대통령 지지율을 보면 지지율이 80%를 넘은 경우는 딱 세 번 있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 부시·아들 부시 전 대통령, 이렇게 세 번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80% 이상 급상승한 경우는 전쟁 같은 군사적 위기 상황 때였다. 9·11 테러와 걸프전을 들 수 있다. 반대로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0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국정수행 지지율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율을 높여 정국을 돌파하려 한다면 오히려 위기를 선호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성공시켜도 좋고, 설사 회담이 실패해 위기지수가 올라가도 손해나는 일은 아니다. ‘그랜드 딜’을 제안해 북한이 받아들이면 좋고, 받지 않아 협상이 결렬돼도 잃을 것이 없다 계산했을지 모른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것을 몰랐던 듯싶다.

트럼프 대통령 계산에는 미국 하원의 대북정책 청문회도 한몫했으리라 추론된다. 미국 하원은 미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2월 26일 대북 관련 청문회를 열고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진단했다. 청문회에서 테드 요호 공화당 하원 의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행동이 진실하다는 확신과 검증이 있을 때까지 제재를 해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에서 가장 자주 북한을 왕래한 인사 중 한 명인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는 “이번 회담에서 비핵화 시간표 등 자세한 협상 틀이 마련돼야 한다. 최종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기준 원칙, 용어 정의와 제한 사항, 협상 과정의 시간표와 이정표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나온 얘기는, 북한이 비핵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예측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며 트럼프 대통령이 대폭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트럼프 대통령은 부담이 적지 않았을 터다. 이런 부담이 협상 결렬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 하원은 대북정책 청문회를 추후에 다시 열 생각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도 부담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받기만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가장 확실한 성과라 할 수 있는 ‘그랜드 딜’을 밀어붙였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것 말고 미국 국내 정치적 요인을 또 한 가지 꼽자면, 바로 대북 문제에 대한 여론 관심이 트럼프 대통령 개인 변호사였던 코언 청문회에 의해 덮였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른바 ‘스몰 딜’에 만족하려 했다면 아마도 이중고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 코언 청문회에서 나온 증언에다 북한에 무조건 양보했다는 ‘비난의 이중고’다. 따라서 고심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그랜드 딜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그랜드 딜 제안을 통해 여론 비난을 피하고, 북한이 받지 않아 결렬됐을 때에는 코언 청문회에 쏠린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련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미국이 북한을 달래기 위해 추가적인 양보를 할 이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에 뭔가 알파를 더하는 정도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이게 북한이 당황한 이유다.

이제 우리 정부 판단이 정확한 것인지 생각해보자. 지금 같은 상황에서 플러스 알파를 북한에 설득하려는 행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미북정상회담 직전 청와대 언급을 볼 때, 우리 정부가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현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가에 의구심마저 생긴다. 미북정상회담 이틀 전만 해도 ‘미국과 북한 사이의 종전 선언 가능성’과 ‘신한반도 체제’를 주장하지 않았나. 미국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획득했다면 이런 장밋빛 언급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정부는 미북정상회담 결렬 이후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느라 부산한데, 이는 회담 전에는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플러스 알파를 북한에 설득하려 한다는 것이 북한 입장에서도 설득력 있는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북한은 우리를 통해 미국의 대북정치 행위에 대한 정확한 의도와 정보를 파악하려 하는데, 과연 지금 북한 눈에 우리 정부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적임자로 비칠 것인가.

일각에서는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가 북한의 캐시카우기 때문에 한국을 무시할 수 없다는 논지를 피력한다. 그러나 지금의 제재 국면에서 그 정도의 경제적 지원은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이를 감안하면 앞으로 우리의 중재 역할은 쉽지 않을 것이다.

회담 결렬을 통해 문재인정부가 알았으면 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가 작아질 경우 북한과의 접촉조차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북한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와 미국이 밀접한 관계기 때문이다. 미국과 우리의 관계에서 약간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인다면 북한은 우리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정부가 노력해야 할 점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 또다시 중재자 역할을 한다고 나서는 것보다 한미관계를 보다 돈독히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만 북한에 ‘말’이 먹힐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정부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다시 미국과 논의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인지 숙고해야 한다. 미국이 제안을 거부하면 미국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북한은 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다. 당연히 북한을 설득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지금은 남북경협을 서두를 때가 아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북 문제에 대한 미국 신뢰를 얻어 우리의 말과 행동에 힘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외교는 주관적 희망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상황 판단과 행동만이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매경이코노미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99호 (2019.03.13~2019.03.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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