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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월드리포트] '헤이세이 30년' 출판물 1위는 [1Q84]…하루키, 日 아사히신문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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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불온함'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의 힘' 필요"

올해 일본에 예정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가 일왕의 '생전 퇴위'입니다. 현재 일왕인 아키히토가 물러나고 5월부터는 지금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이 되는 겁니다. 이때 '연호'도 바뀌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다이쇼-쇼와-헤이세이로 이어진 연호의 계보에 하나가 더 생기는데, 이 새 연호는 4월 1일에 발표될 예정입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재위가 끝나면서 '헤이세이' 시대도 막을 내리는 셈인데요,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에서는 헤이세이 30년을 돌아보는 다양한 기획들이 언론 매체들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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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아사히신문의 어제(7일) 기획 기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헤이세이 시대에 출간된 책 가운데 '베스트 30'을 뽑는 기획입니다.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에게 아사히신문이 앙케이트를 돌려 120명의 답변을 얻었는데요, 영예의 1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차지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2면을 털어 '헤이세이 책 베스트 30' 기사를 올리면서 1위를 차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 기사를 올렸습니다.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 연대기]도 10위를 차지했습니다.) 하루키 소식으로 그동안 종종 취재파일 독자들에게 인사를 드려왔고, 그 덕분인지 올해부터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제가 이 기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늦었지만 하루키와 아사히신문의 인터뷰 내용을 '발 번역'으로 전해드립니다. 번역이 말끔하지 않고, 100% 정확하냐고 하면 그렇다고 할 자신은 없지만 이런 내용의 인터뷰입니다.

● 헤이세이를 비추며 시대를 걷다

-(아사히신문) 헤이세이라는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1Q84]와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많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루키) 헤이세이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91년 1월에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마침 걸프전이 시작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끝내고 고쳐 쓰자는 기분이 강했죠. 쇼와 시대의 끝물에 [노르웨이의 숲(1987)]이 생각하지도 못하게 베스트셀러가 되어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일본을 떠나 일본인과 만나지 않고, 혼자 틀어박혀서 집중해서 썼습니다. [태엽감는 새]는 저에게 있어서도 상징적이고 의욕적인 소설입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벽 빠져나가기'입니다. 주인공이 우물의 바닥에서 홀로 줄곧 생각을 거듭하다가 다른 세계와 연결됩니다. 심층 의식의 한가운데 들어가 출입구를 찾습니다. [태엽감는 새]에서 처음 나온 이 '벽 빠져나가기'는 소설적인 상상력을 해방시켜, 이야기의 기폭장치가 되었습니다.

-폭력이나 근원적인 악을 묘사하는 자세가 표현된 작품입니다.

=옛날에, '무라카미 씨의 소설에는 '악'이라는 존재가 나오지 않네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꽤 궁리를 해 봤습니다. 순수한 개념으로서의 '악'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이죠. 도스토예프스키도 발자크도 디킨즈도 '악'을 묘사하는 게 능숙해 동경해 왔습니다. 제 자신에게는 악의 감각이 결락되어 있다고 해도, 힘을 내서 상상력을 가동시키니 제 안에 있는 '악'의 존재가 점점 보이는 것 같은 감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중한 작품입니다.

● 95년은 나의 전환점…뭔가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뒤, 1995년에 한신 대지진과 (옴 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95년은 저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베의 지진으로 제가 자란 집도 크게 망가졌습니다. 미국 생활을 중단하고 일본에 돌아가기로 결심했죠. 지진과 사린 사건에 대해서는 무언가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신념의 하나입니다만, 소설가는 작품이 전부입니다. 옳은 말만 하고 있으면 작품 자체는 변변치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한 명의 시민이기 때문에 소설가로서의 아이덴티티와 레벨을 맞춰가면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론만 잔뜩 말해서 상상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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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를 취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발행했습니다.

=인터뷰에서는 신상의 이야기부터 길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생, 학교, 가정, 결혼, 직장…그 사람의 인생에 사린 사건이 어떤 조각으로 들어가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흡수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옳은 것'을 떠오르게 하려고 했습니다. 제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1999년에 발표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는 지진의 영향이 느껴진 단편집이었습니다.

=고베는 무대로 그치고, 지진은 직접 꺼내지 않는다는 두 가지 원칙으로 썼습니다. 직접적인 표현 등을 걷어내고 본질을 쓴다, 말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이야기에 의탁한다. 구체적인 것은 쓰여 있지 않지만 범용성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유고슬라비아의 어떤 사람이 내전에 휘말린다든가 하는 거죠. 본질은 같지만, 상황이 바뀌어 있다는 것이죠. [언더그라운드]와 [신의 아이들]이 헤이세이 시대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소설가로서 나아갈 방향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 사물의 본질을 정립하는 나와 독자의 공동작업

-세계 속에서, 비참한 사건의 뒤에는 무라카미 씨의 작품이 폭넓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하던 기성의 사물들이 갑자기 붕괴하거나 사라져버리거나 할 때 왠지 제 작품이 읽히는 일이 많습니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천황이 죽고 헤이세이가 되고, 버블이 터지고, 한신 대지진과 사린 사건이 있을 무렵부터, 제 작품이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해변의 카프카(2002)]에서 가장 쓰고 싶었던 것은 불온한 진동(바이브레이션)이었습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세계에 존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인 15세 소년의 시점에서 보는 겁니다. 사물과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시기죠. 어른의 선험적인 것을 배제하고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는 겁니다. 사물 그 자체에 의해, 그것이 어떤 식으로 보이고 들리는가 하는 그 지점에서 어떤 식으로 바이브레이션을 느낄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진동의 총합으로부터 독자가 사물의 본질을 정립하는 것이 제가 하고자 했던 작업입니다. 저와 독자의 공동작업이었던 것이죠.

-예루살렘 상(2009년 수상)의 '벽과 알' 언급도 있었고("여기 거대한 벽이 있고 그 벽에 던져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그 알의 편에 서겠다"/발 번역자 주), 카탈루니아 국제상(2011년) 수상 때는 동일본대지진의 원전 사고에 대해 언급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 좋은지 나쁜지를 말할 수 없는 경우, 과연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원전을 폐지하자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상처 입혔는가에 호소하는 것이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 세력을 이루고 있는 시대에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포지션이 확실이 만들어져 있는 시대라서, 이 사람이라면 이런 발언을 하겠구나,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는 고통스러운 부분입니다만, 생각을 응축시킨 다음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입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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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는 3권으로 완결인가요?

=[1Q84]와 [태엽감는 새]의 공통점은, 제2부까지 쓰고 나서 그사이에 시간을 두지 않고 제3부를 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하나의 작품으로 정리를 한 거죠. 그래도 결론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1Q84]는 산유테이 엔쵸(三遊亭圓朝)의 라쿠고 [신케이가사네가후치(眞景累ケ淵)]처럼 긴 인연을 다룬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덴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서로 만나게 되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덴고와 아오마메 두 사람이 코스타리카에 간 뒤의 일, 두 사람 사이의 딸에 대한 것 같은 것들도요. 이야기는 완성돼 있지만요. 마치 재즈에서 화음의 바탕음을 다듬는 것과 같아서, 공백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불가사의한 터널에서 이어지는 '만다라' 같은 걸 좋아하거든요.

● 사회의 불편함 적극적으로 해소하는 이야기의 힘

-사회의 불온함을 어떤 방식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포와 분노에 내던져지고 부딪치며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층 의식이 붙잡고 있는 분노와 공포죠.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로서 그런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선한 것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선과 악이 혼재할 때도 있고 하니 굉장히 어렵습니다. 9.11 사태 직후에도 그런 걸 느꼈습니다. 공포와 분노를 일부러 억누르고 숨기려고 하는 분위기도 있었죠. 나치의 가스실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리비저니스트(수정주의자)들이 그 예입니다. 이야기를 쓸 때에는 그 지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선인가 악인가가 좀처럼 잘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SNS는 하지 않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없는 불편한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부수고 제거해 나가는 데는 이야기의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울하고 어두운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싸구려 말로 표현되어 있죠. 문장이나 말은 무섭습니다. 날카로운 무기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게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무기로 사용하려고 하고 있는가, 이 부분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맞서 나가는가는 앞으로 문장가, 특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즉 저를 포함한 소설가들에게 있어서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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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하루키를 다룬 제 취재파일을 기억하는 독자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몇 개는 '노벨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 노벨상 얘기냐며 타박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난해 불미스러운 일로 건너뛰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올해는 예정대로 10월 첫 주에 이뤄진다고 합니다. 게다가 올해는 작년 수상자와 올해 수상자를 한꺼번에 발표한다고 합니다. 10월에 쓸 기사를 슬슬 구상해 놓아야 하는 것일까요. 어차피 노벨문학상을 두 번 탈 수는 없으니, 기왕에 해야 하는 거라면 빨리 써 버리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도 솔직히 조금 있습니다.

(사진=아사히신문 캡처,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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