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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월간중앙 이슈해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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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손보려 ‘국민 저금통’ 배 가른다?

“공정경제 도구” 대통령 말에 ‘주주권 적극 행사’로 입장 바꿔... 단기 이익 노린 투기자본 놀이터 전락해 기금 안정성 해칠 수도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국민연금의 방침에 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 요즘 재계에서 가장 핫한 단어다. 뜨거운 관심만큼 논란도 크다. 다양한 주장과 해석이 존재하는 만큼 섣불리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그런데 논쟁의 중심에서 정작 ‘개미’들은 소외돼 있다. 용어부터 낯설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한국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영양제가 될 수 있을까. 이를 둘러싼 논란을 해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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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대기업 경영을 감시하겠다고 나서면서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쟁의 전면에 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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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국민연금이 톡톡히 망신당한 거죠.”

지난 2월 12일에 만난 한 대기업의 대관팀 직원 A씨의 말이다. 하루 전날 있었던 남양유업의 ‘반란’을 두고 한 얘기다. 남양유업은 2월 11일 공식 입장문을 냈다. 내용은 이랬다. “지분 6.15%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주주권익을 대변한다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고, 오히려 합법적인 고배당 정책을 이용해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이익 증대를 대변하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남양유업 3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이 회사에 배당 확대를 요구한 것에 대한 공개 반박이었다. 국민연금은 앞서 남양유업에 배당정책 수립을 심의·자문하는 위원회를 설치하자며 정관 변경을 위한 주주제안을 했다. 남양유업은 배당에 인색한 기업으로 꼽힌다. 2010년 이후부터 주당 배당금을 보통주 기준 1000원, 우선주 기준 1050원을 고수해왔다. 그나마 2010년 이전보다 각각 50원씩 늘어난 게 이 정도였다.

남양유업의 반박문은 한 마디로 ‘나서지 말라’는 거였다. 이어진 대목은 제안을 한 국민연금이 머쓱할 정도다. “배당을 확대한다면 늘어난 배당금의 50% 이상을 가져가는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이 혜택을 보게 되기 때문에, 사내유보금으로 기업가치 상승을 견인하기 위해 지금까지 낮은 배당정책을 유지해온 것이다.” 배당금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최대 주주도 가만히 있는데 왜 국민연금이 나서느냐는 면박에 가까웠다.

이 회사는 최대주주 홍원식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 지분율이 53.85%(보통주 기준)이다. 이어 신영자산운용(6.82%), 국민연금공단(6.15%), 외국계 퍼스트이글펀드(5.55%) 순이다. 배당을 늘렸을 때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건 홍 회장 일가다. 재벌의 곳간을 채우는 데 국민연금이 앞장서는 셈이다. 국민연금은 왜 이런 무리수를 두려는 걸까.

남양유업은 그 동안 저배당 정책을 통해 사내유보금을 늘림으로써 재무구조 건전성을 확보하는 경영전략을 펴왔다. 이런 기조 덕분에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부터 무차입 경영을 유지해왔다. 재무구조 건전성과 기업 가치가 동반 상승하는 효과도 누렸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지만 배당금이 끊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배당금은 적어도 비교적 안전한 자산으로 꼽혔다.

‘배당금 확대’ 요구했다가…국민연금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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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민주당 의원과 윤소하 정의당 의원,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조합원 등이 지난해 8월 16일 국회 정론관에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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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배당 확대 요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부터 배당 확대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다만 그 동안에는 주주로서 의견을 내는 수준이었다. 올해 다른 점은 정관 변경안을 주주총회 안건으로 제안함으로써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로 태도를 바꿨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수탁자 책임전문위원회는 지난 2월 7일 분과위원회를 열어 이 같은 방침을 정했다.

이런 태도 변화는 지난달 공개한 ‘국민연금기금 국내주식 수탁자 책임활동 가이드라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몇 가지 기준에 해당하는 회사에 주주권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배당 성향이 낮거나 비합리적인 배당 정책 환경 ▷사회적 책임·지배구조 하위등급 ▷사회적 논란 야기 등에 해당되는 회사가 대상이다.

국민연금의 이런 시도는 올해 들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남양유업에 대한 주주제안 방침에 앞서 3월에 열리는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정관 변경을 시도하겠다고도 예고했다. ‘횡령·배임으로 형을 받은 이사는 3년간 이사직에서 배제’하는 내용이다. 갑질 논란을 일으킨 조양호 회장 일가를 정조준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기업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남양유업은 2013년 대리점 밀어내기 갑질이 드러나 지탄을 받았다. 불매운동의 여파로 2013, 2014년에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2015년에 흑자전환에 성공했지만 매출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A씨는 “‘다음 차례는 OO’라는 구체적인 예상 리스트도 돈다”고 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297개다. 그 중 49개가 배당 성향이 10%를 밑돈다.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면 이 업체들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실험 대상 후보가 될 수 있다. 특히 대주주 지분이 40%를 넘으면서 배당성향이 10% 이하인 기업들이 첫 타깃이 될 거란 예상이 나온다. 여기에 드는 기업은 대한해운, CJ대한통운, 화승엔터프라이즈, AK홀딩스, 팬오션, 경동나비엔, 한국가스공사, 대우건설, 대한해운, 후성, NHN엔터테인먼트, 삼양식품, 영원무역홀딩스, 현대로템, 현대미포조선, 한국타이어, 현대리바트 등이다.

눈치만 보던 몇몇 기업들은 스스로 행동에 나섰다. 저배당 기업 중 하나인 현대그린푸드는 지난 2월 8일 2018 회계연도 배당성향을 종전 6.2%에서 두 배 이상 높은 13%로 높이기로 했다. 주당 배당금은 80원에서 210원으로 대폭 오른다. 국민연금은 현대그린푸드의 지분 12.82%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23.0%)과 정지선 회장(12.7%) 등 오너 일가와 특수관계인이 37.7%의 지분을 가졌다. 지난해 5월 국민연금은 남양유업과 함께 현대그린푸드를 ‘저배당 중점관리기업’ 명단에 올렸다. 오너리스크 문제 기업 중 하나인 삼양식품도 배당금을 주당 250원에서 400원으로 크게 올렸다.

‘알아서 긴’ 덕분일까. 국민연금은 2월 14일 수탁자위원회를 열어 현대그린푸드를 저배당 공개중점관리기업에서 해제했다. 으름장을 놨던 주주제안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회사가 배당정책을 수립했고, 배당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등 개선 노력을 보였다는 이유다.

사회적 물의 빚은 ‘짠 배당’ 기업 정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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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욱 회장의 운전기사 갑질 논란이 있었던 대림산업도 우선 타깃으로 거론된다. 국민연금이 이 회사 지분 13.25%를 보유해 2대 주주다. 대림산업의 최근 3년간 배당성향은 4~8%에 불과했다. 최근 들어 외국인 지분율이 32%에서 47%까지 상승해 행동주의 펀드의 먹잇감으로도 오르내린다.

국민연금의 배당 확대 요구는 소액 주주들에게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그 동안 주주총회에서 비중 있는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소액 주주들을 국민연금이 대변해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업 가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오너리스크를 국민연금이 직접 나서서 관리하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배당 기업은 주식시장에서 상당한 매력 요인이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행동주의 펀드’가 저배당 기업 발굴에 주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원조격인 ‘강성부 펀드(KCGI)’는 스튜어드십 코드로 무장한 국민연금과 함께 조양호 한진그룹 일가를 협공하고 있다. ‘배당금 상향-주가 상승’의 공식 때문에 행동주의 펀드의 포트폴리오를 좇아 투자하는 소액 투자자들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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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2월 1일 제2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기금운용위는 앞서 열린 수탁자전문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진그룹에 대한 경영 참여를 선언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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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주의 펀드가 사적 이익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국민연금은 공익(공정경제 실현)에 좀 더 무게를 둔다. 명분이야 어떻든 배당금과 주가 상승에 대한 개미들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2월 초 보고서에서 “현대그린푸드는 현대백화점의 실질적 사업지주회사로서 지배구조 개선 및 배당 확대의 최대 수혜자”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국민연금은 대주주의 백기투항을 받아낼 수 있을까. 주식시장에서 최고의 권력은 지분이다. 주주총회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표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 국민연금의 기업 지분은 대개 10% 안팎이다.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국민연금이 주주 권리 행사를 시도한 적은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갑질의 대표 기업으로 낙인찍힌 대한항공과 한진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조 회장 일가가 사회적 물의를 빚자 국민연금은 실력행사로 나섰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승희 의원(자유한국당)이 1월 말에 공개한 국민연금 수탁자전문위회의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최근 4년간(2015~2018년) 대한항공과 지주사인 한진칼 주총에 참석해 32개 안건 표결에 참여했다. 이 중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은 7건이었다. 2015년 3월 대한항공 정기 주총에서 조원태 이사 선임 안건에 대해 “과도한 겸임과 장기 연임 중인 인사”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듬해(2016) 주총에서도 조양호·이석우·김재일 이사 선임건을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2017년 3월 한진칼 정기주총에서도 조양호·조원태·이석우 이사 선임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승산 없는 표 대결 고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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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들은 모두 가결됐다. 조 회장 일가와 표 대결에서 밀려서다. 2016년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사 선임도 반대했지만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판단 기준에 따르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기업가치의 훼손이나 주주 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사람은 이사 선임에 반대할 수 있다. 국민연금이 한진칼과 대한항공, SK그룹 주총에서 오너 일가의 이사 선임을 반대한 건 이 기준에 근거해서다. 취지는 좋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이다.

올해도 조 회장 일가의 이사 선임을 두고 표 대결이 예고돼 있다. 한진칼에 대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방침을 굳혔다. 대한항공은 수탁자전문위원인 이상훈 변호사가 ‘프록시 파이트(위임장 대결)’를 통해 조 회장의 이사 재선임을 막겠다고 천명했다. 수탁자전문위원 9명 중 7명이 이번에도 반대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지분은 11.7%다. 조 회장의 우호지분은 33.35%가 넘는다. 그 외에 외국인 지분이 20.61%이고 개미 투자자 등 내국인 지분이 34.34%다. 이 변호사는 “주총만 공정하게 진행되면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전망했다.

두 번째 궁금증. ‘국민연금은 누구를 위해(혹은 ‘누구에 의해’) 움직이는가’이다. 국민이 맡긴 돈이니 잘 굴려서 더 큰 이익으로 국민에게 돌려주는 게 국민연금공단의 역할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원칙)란 용어의 개념도 여기서 출발했다.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공동대표)에 따르면 2010년 7월 영국이 금융위기 발발을 막지 못한 기관투자가의 반성에서 출발한 ‘영국 SC(The UK Stewardship Code)’가 원조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영국에서 도입할 때에는 투자 회사의 중장기 가치를 지향하고 고객 이익을 높여준다는 관점이었다”고 설명했다. 지금 한국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목적은 이 취지에 충실한 걸까.

지난 1월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공정경제 추진전략회의.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경제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책임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틀린 것은 바로잡고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겠다”고 천명했다.

같은 날 열린 국민연금 수탁자위원회 주주권분과위원회는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위한 세부 방안을 논의했다. 결과는 ‘반대’였다. 대통령의 주문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앞서 1월 16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수탁자위에 대한항공 관련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결의하고, 세부 방안 마련을 분과위에 요청했다. 조양호 회장을 이사에서 해임하는 주주제안이 첫 번째 후보 카드였다. 사외이사 선임, 정관 변경, 의결권 대리행사 등의 대안이 제시됐다.

하지만 분과위원 9명 중 7명이 대한항공 경영 참여를 반대했다. 한진칼에 대해서도 과반을 넘는 5명이 반대했다. 자본시장법에 명시된 ‘10%룰’ 때문이다. 대한항공 지분을 10% 넘게 가진 국민연금이니 단순 투자 목적을 경영 참여로 바꿀 경우 5일 안에 지분 변동을 공시하고 6개월 이내의 단기매매 차익을 대한항공에 돌려줘야 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경영참여형으로 투자목적을 바꿀 경우 지난 3년간 반환해야 할 차익은 최대 489억원에 달한다. 표 대결의 승산이 거의 없는데 자칫 목적 달성은 실패하고 돈만 토해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김우진 위원(서울대 교수)은 “경영 참여의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론이 압도했다”고 했다.

국민의 돈인가, 정부의 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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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에 명시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공약.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쟁이 이대로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반전이 일어났다. 2월 1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한진칼에 대해 경영참여형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결정한 것이다. 10%룰에 걸리는 대한항공 대신 지주회사인 한진칼을 통해 오너 일가를 손보겠다는 의미로 재계는 받아들였다. 문 대통령의 주문에도 전문가그룹인 수탁자위가 움직이지 않자 국민연금의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가 직접 나선 것이다.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전문가들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민연금의 자율운용 원칙을 무너뜨리고 정부 개입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거나 마찬가지란 비판이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 언론사 좌담회에서 “기금은 국민의 돈을 임시로 운용하는 곳이다. 운용방법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갑자기 정치적 동기에 의해 주주권을 얘기한다. 국민 세금으로 기업(주식) 사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사회주의 아니냐”고 말했다.

찬성론자들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관치(官治)’에 해당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는 언론 기고를 통해 “문 대통령이 말한 것은 대기업 대주주의 명백한 탈·위법에 대해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말인데 그게 어떻게 경영권 침해냐”고 반박한다. 취지가 좋으니 연기금 운용에 관한 정치권력의 간섭이 큰 문제 될 게 없다는 뉘앙스다. 한 중견기업 임원은 “같은 논리라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진 것도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한 좋은 취지였으니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고 꼬집었다.

이같은 인식에 대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비판적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신 교수는 국민연금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켰다.

“국민연금은 가입자 돈이다. 국민이 잠시 맡긴 노후자금이다. 정책적 목적이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큰 착각이다. 국민연금이 추구해야 할 공익은 중장기 투자수익률이다. 연금 가입자를 위해 이보다 더 큰 공익이 어디 있나.”

국민 노후자금, 약탈자본 배만 불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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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1일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오른쪽)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서울 전경련회관에서 ‘기업과 혁신 생태계’ 특별 대담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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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을 때 단기적 효과보다 중장기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스튜어드십 코드로 확인된 것은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 단기적인 주가 상승 효과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부분 일치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쟁이 본격화하면서 국내 상장기업들의 현금배당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정보 포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월 12일까지 2018년 결산배당 공시를 마친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412곳의 주당배당금은 직전 회계연도 대비 평균 10.32% 늘었다. 새로 현금배당을 실시한 기업도 50곳이다. 412개 상장사의 현금배당 총액은 2017년 18조5150억원에서 지난해 23조2222억원으로 25.4% 증가했다. 금융투자업계는 이런 추세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함께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기업이 적극적인 주주 환원정책에 나섰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단기 효과를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국내 주식시장이 단기차익을 노리는 외국 자본들의 놀이터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중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위험 요인이 증가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 비율은 20% 수준이다. 80%는 행동주의에 쓸 수 없는 돈이다. 그나마 주식투자금의 수익도 대부분 거래에서 발생한다. 행동주의를 통해 기금 수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다. 이어지는 신 교수의 설명이다.

“기관투자자 행동주의가 198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중장기적으로 주가가 높아졌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기업 성장잠재력을 갉아먹고 경제 전체적으로 고용 불안과 분배 악화라는 부정적 결과가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기업의 이익을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에 쓰고 나니 기업이 어려워졌을 때 돈을 빌리거나 구조조정(대량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약탈적 가치 착출’의 증거는 많다.”

신 교수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라고도 비판했다. 그는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나 의사결정 방식에 문제가 있고,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문제”라며 “연금 본래 역할 이외의 목적을 갖고 기업활동에 영향을 주려고 하기 때문에 ‘연금사회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고 했다. 신 교수는 지난해 7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와 전경련에서 가진 ‘기업과 혁신 생태계’ 특별대담에서 “국민연금이 독립적으로 투자수익률 전망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 자본주의 정책이건 사회주의 정책이건 정부 정책을 따라 의사결정을 하면 모두 연금사회주의가 된다”고 주장했다.

“연금가입자들은 노후대비 자금을 잘 굴려달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가입자들은 국민연금을 대기업 개혁을 위한 ‘공정경제’ 달성의 수단으로 쓰라고 동의한 적 없다. 정책 실현은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면 된다.”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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