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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조선업 노동자 또 ‘해고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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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대우조선 노조, 인수 반대 파업 결의… 하청업체·경남 지역사회도 반대



경향신문

/ 일러스트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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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 노조에 이어 현대중공업 노조가 대우조선해양 인수 반대 파업을 결의했다. 인수과정에서 있을지 모를 구조조정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조선업의 한 축인 조선 기자재 업체들도 생태계 붕괴 위험을 경고하며 반발하고 있다. 두 회사로부터 갑질피해를 주장하는 하청업체 단체와 경남 지역사회도 인수·합병 반대편에 섰다.

이들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다. 투쟁 의사를 밝힌 노동자에 대한 비판의 수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조선업 회생 기회 앞에서 몽니를 부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은 조선업 르네상스를 향하는 뱃길을 막아선 ‘암초’에 불과한 것일까.

“(인수과정에서) 구조조정 계획이 있는가?” “현 시점에서는 답변하기 어렵다.”

지난 1월 31일 대우조선해양 인수 관련 구조조정 질의에 대한 현대중공업의 공식 답변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 사이에 불안감이 퍼졌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파업 찬반투표 하루 전인 2월 19일, 한영석·가삼현 현대중공업 공동대표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쪽을 희생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노조는 사측의 말을 믿지 않았고 다음날 파업을 결의했다.

“대량실업 초래할 가능성 매우 크다”

2015년부터 시작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현대중공업 노동자 863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전체 직원의 30.5%에 달하는 인원이다. 사내하청노동자는 2014년 4만1000명에서 2017년 1만9000명으로 줄었다. 하청노동자를 포함, 해당 기간 회사를 떠난 노동자는 3만명에 이른다. 조선 3사(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가운데 최근까지 대규모 구조조정을 이어온 곳은 현대중공업이었다.

이런 가운데 들려온 대우조선 인수 소식은 노동자들에게는 추가 구조조정 계획이나 다를 게 없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김형균 정책기획실장은 “장기간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에게 해고 트라우마가 생긴 상태”라며 “이번 사안은 단순히 노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산업 전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생계 문제”라고 말했다.

조선업계에서도 인력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연구개발과 설계, 영업, 재무 분야 사무직 인력이 구조조정 1순위에 올랐다. 당장 조업에 투입되는 생산직에 대한 구조조정은 그 다음으로 꼽혔다. 업무 특성과 수주물량에 따라 중장기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허민영 경성대 교수는 “대우조선 인수사태가 지속된다면 불가피하게 대량실업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노조 차원에서 일자리 대책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조선 기자재 납품업체들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거제·경남·부산 중소업체에서 기자재를 납품받는 대우조선과 달리 현대중공업은 기자재의 80%가량을 자회사에서 충당한다. 두 회사의 인수·합병 이후 대우조선와 거래하던 업체들은 매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쓴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자재 업체 매출 감소 이슈도 협상 테이블에 꺼내놓고 공식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며 “민간기업에 경영권을 넘기면서 이런 문제를 방치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2015년 기준 대우조선 하청업체는 598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중복 납품업체를 제외한 대우조선 전속 하청업체 수는 271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대우조선 1·2차 하청업체 노동자 수는 1만7300여명으로 이들은 대우조선 매각 이후 고용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남해안 조선벨트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김정환 본부장은 “대우조선 인수로 중소 기자재·협력업체는 주요 거래처를 잃게 됐다.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며 “단가 후려치기와 같은 독점기업 갑질에 대한 우려도 더 커졌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운좋게 거래가 끊기지 않더라도 납품단가가 낮아지게 될 것”이라며 “둘이 합치면 조선업 전반이 좋아진다고들 하는데 거기에 우리 같은 업체는 해당이 안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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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본사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 대우조선지회 조합원들이 현대중공업으로의 매각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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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자재 납품 업체들도 위기감

현대중공업과 경쟁을 벌여온 엔진 생산업체들이 처한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전체 매출의 40%가 대우조선을 통해 발생하는 HSD엔진은 주요 거래처를 잃게 될 처지에 놓였다. 중속 엔진을 생산하는 STX 엔진도 매출 급감에 따른 고용불안을 우려하고 있다. 이상우 HSD엔진지회 지회장은 “우리는 현대중공업과 경쟁을 벌이던 업체이기 때문에 대우조선이 넘어가면 거래가 완전히 단절된다”며 “1000개가 넘는 HSD 협력사도 흔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으로부터 하도급 갑질 피해를 입은 하청업체들은 기다리던 배상이 요원해졌다. 지난해 12월 공정거래위원회는 대우조선해양이 2013~2016년 하도급 계약서를 제때 작성하지 않고 하도급 대금을 부당하게 깎은 사실을 적발해 과징금 108억원을 부과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피해 하청업체들이 문제를 제기해 3년을 싸우고 기다려서 얻은 결과였다. 공정위 판단에 따라 피해업체들은 대우조선에 신속한 피해배상을 요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대우조선이 인수절차를 밟게 됨에 따라 피해배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대우조선 협력업체 대책위 윤범석 위원장은 “산업은행의 관심사는 매각작업뿐이어서 피해업체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며 “간신히 피해사실을 인정받았는데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고 말했다.

대우조선 인수협상은 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이 만든 ‘밀실’에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조선업계 이해당사자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노동자와 협력업체, 지역 자영업자와 주민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지극히 정당하다”며 “노조가 요구하기 전에 정부가 먼저 해결방안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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