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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웃돈 요구 ‘플미충’에 관객은 부글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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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을 가득 메운 워너원의 팬들. /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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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선좌’야.” “‘플미충’ 짜증나.”

한 아이돌 그룹의 팬인 대학생 최모씨(22)는 지난 1월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의 팬미팅 예매 개시시간에 맞춰 친구와 PC방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최씨와 친구는 모두 예매에 실패했다. 첫 예매 시도부터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화면인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이선좌)라는 팝업이 떴다. 고심 끝에 고르고 골라 예매를 시도한 관람석이 이미 다른 관객에게 넘어간 것이다. 처음부터 ‘이선좌’를 봤다면 뒤이어 대안으로 생각해둔 자리에 예매를 시도해도 늦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여러 자리를 싹쓸이한 뒤 차액을 남겨 파는 이른바 ‘플미충’(프리미엄+충)들이 좋은 자리를 남겨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워너원 마지막 콘서트 1500만원 부르기도

‘플미충’이라는 신조어가 붙은 공연계의 암표상들은 최씨 같은 팬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다.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기회,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할 각오를 가지고 공연을 기대하는 팬과 관객들에게 처음부터 불쾌한 경험을 안겨주는 것이다. 최씨는 예매 실패 후 바로 공연 티켓 거래사이트 게시판에 들어갔다. 예매 개시 후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벌써 공연표를 판다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씨는 “이번 팬미팅은 어떻게 해서든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표를 못구하면 프리미엄이 좀 붙더라도 ‘플미충’한테서 살 생각도 있었다”면서도 “다행히 ‘취케팅’에 성공해 그럴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취케팅’이란 일종의 패자부활전이다. 첫 예매 후 취소된 자리의 표가 다시 풀리기 때문에 취케팅이라고 불리지만 자리 수가 제한된 만큼 경쟁률도 더 치열하다. 경쟁이 치열한 공연 예매 과정에서 팬들은 티켓 값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무통장입금을 가장 선호한다. 일일이 신용카드 번호와 유효기간 등을 입력하려면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우선 표를 잡아놓고 대금은 차후에 계좌이체로 지불하는 것이 빠르다. 무통장입금을 택한 뒤 대개 하루 안에 입금확인이 되지 않으면 해당 좌석 표는 취소된다. 이 취소된 자리들이 정가에 공연 관람을 원하는 관객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는 셈이다.

물론 ‘취케팅’까지 실패한다 하더라도 아예 공연 관람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플미충들이 파는 암표를 구할 방법은 많이 있기 때문이다. 1980~1990년대 단관 영화관이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등에서 암표를 구할 때와는 다르다. 얼마나 바가지를 쓰는지도 모르고 그저 ‘부르는 게 값’이었던 당시와는 달리 표의 정가와 웃돈의 액수까지 공개되고 있으므로 시장원리에 따라 일정 선에서 ‘프리미엄’의 범위도 암묵적으로 정해진다. 공연·경기장의 발매장소 인근에서 암표를 거래하는 것이 위법인 것과 달리 온라인으로 거래하면 법에 저촉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암표에 ‘적정 수준’의 웃돈을 기대하는 행태를 비웃듯 가격이 상식 이상으로 치솟는 경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 1월 말 열린 아이돌 그룹 워너원의 마지막 콘서트에선 좌석 하나에 1500만원을 넘는 금액을 부르는 암표상이 등장할 정도였다. 가장 비싼 좌석의 정가가 12만원이었지만 온라인 티켓 거래사이트에서는 1000만원을 부르는 일이 흔하게 발견될 정도로 암표 거래가 기승을 부렸다. 공연업계의 한 관계자는 “실제로 1000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됐을 가능성은 낮겠지만 200만~300만원대의 티켓 값을 내고 관람했다는 예는 쉽게 접할 수 있었다”며 “무대와 거리가 먼 3·4층 자리도 기본 50만원 이상에 거래된 것을 볼 때 일부 암표상들이 호가를 높게 불러 팬들의 심리를 자극한 게 영향을 준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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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 매진된 한 뮤지컬 공연의 예매 화면 / 인터파크 공연예매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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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표상,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표 확보

수십 배에 달하는 웃돈을 주는 암표는 그동안 많은 팬들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나 스타 배우·해외 원작 출연진이 나오는 뮤지컬 등에서 흔히 발견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팬미팅을 비롯해 영화 개봉 인사, 심지어는 무료입장 공연 등에서도 ‘플미충’의 암표가 나타나고 있다. 관객 동원력이 큰 스타 연예인의 공연이나 대형 스포츠 경기를 앞두면 티켓 거래 전문사이트는 물론 소셜미디어(SNS)까지 웃돈을 붙인 암표 거래를 위한 채널로 변하는 것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2019년 공연계 6대 키워드에도 ‘플미충’이 포함돼 ‘주 52시간제’ ‘카카오M’ ‘페미니즘’ ‘경량화’ ‘중국’ 등의 키워드와 함께 올해 공연계의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암표가 점차 일상화되고 있는 배경에는 단속이나 제재가 어려운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특정 시기에만 접속자가 몰리는 현상 때문에 예매사이트 서버 용량을 상시적으로 높게 유지할 수 없는 현실이 대표적이다. 100만명 단위의 대형 팬덤 중 일부만 몰려도 3만~5만명의 동시접속자를 감당할 수 있는 예매사이트는 과부하를 겪게 된다.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라는 화면을 볼 수 있는 것도 운이 좋은 경우이고, 아예 화면이 로딩되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예매가 순식간에 끝나 있을 때도 많다.

게다가 암표상들은 매크로 프로그램을 돌리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일반 관객들보다 빠르게 성공할 수 있다. 공연 일시와 좌석, 결제방식까지 자동으로 클릭하게 해주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써서 암표상들은 보통의 관객들에겐 쉽지 않은 2·3연석까지 쉽게 확보한다. 공연 예매사이트 양식에 맞춰 만들어진 매크로 프로그램은 일반 관객들도 검색만 하면 1만~2만원에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하기가 쉽다. 하지만 매크로를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면 아예 관람이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에 제재가 두려운 일반 관객들이 굳이 이와 같은 편법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예매사이트가 매크로를 방지하는 기술적인 대응책도 쓰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자칫하면 프로그램 구입비용까지 날리고 티켓 예매도 실패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예매사이트가 만든 최소한의 방어대책조차 암표상들이 보완한 매크로 프로그램 앞에서는 무력화되는 게 현실이다. 공연기획사나 예매사이트에서 보다 강도 높은 대비책을 쓰면 일반 관객들이 겪는 불편이 더 커지는 문제가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관객들의 불편 민원을 감수하고 보안문자를 넣어야 예매가 가능하게 하거나, 예매자 이름과 공연장을 방문한 실제 관람객의 이름을 비교하는 등의 대책을 강화해 봐도 이를 피해 갈 꼼수가 나온다. 애초에 공연 티켓을 선물하는 기능이 마련돼 있고 현행법으로 암표의 온라인 거래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암표상들이 근절되지 않는 문제는 법적인 처벌규정이 없다는 데 있다. ‘경범죄 처벌법’에 따라 공연 현장에서 암표를 팔다 적발되면 범칙금을 부과받지만 온라인으로 거래를 하고 티켓을 우편으로 부칠 경우엔 처벌할 규정이 없다. 결국 암표상이나 암표를 구매한 관객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은 공연기획사가 현장에 온 암표 구매 관객의 공연 관람을 막는 방법뿐이다. 그러나 한 콘서트 전문 기획사 관계자는 “매크로를 돌려서 예매한 좌석이 어딘지는 예매처를 통해 금방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좌석의 표를 들고 입장한 관객에게 관람을 못하게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인터넷 암표 거래가 크게 늘었기 때문에 그 많은 수의 관객들을 다 돌려보내다가는 제 시간에 공연 시작을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암표 온라인 거래 법적인 처벌 규정 없어

암표 거래가 늘어나는 현상은 그만큼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공연계 전체의 저변이 확대된 측면도 작용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월 11일 발표한 ‘2018 문화 향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국내 문화·예술 관람률은 81.5%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80%를 돌파했다. 2016년 대비 3.2%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1988년 첫 조사 이후 가장 높았다. 관람 횟수로 따지면 연간 평균 5.6회로 2년 전보다 0.3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연을 즐기는 관객들의 수가 늘면서 온라인을 활용한 암표 거래가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극히 인기가 높은 일부 공연을 제외하면 암표가 거래되는 대다수의 공연에서 웃돈의 액수가 1만~2만원 선에 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공연 중인 국내 뮤지컬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인 <지킬 앤 하이드>는 배우 조승우가 출연하는 회차의 암표 가격이 특히 비싸다. 지난해 예매 개시 초기 정가가 15만원인 VIP석이 50만원대에 거래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웃돈이 2만원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온라인에서 웃돈을 주고 뮤지컬 공연표를 구한 적이 있는 직장인 이현석씨(34)는 “예전에 독일에 있을 때도 합법적으로 프리미엄을 더 주고 공연을 본 적이 있어 해외 오리지널 출연진이 방한한 공연티켓을 장당 2만원씩 더 얹어주고 구매할 때도 크게 문제라는 생각은 없었다”며 “단순히 관객 입장에서만 보면 예매에 쏟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는 대신 조금 더 돈을 내고 편하게 표를 구할 수 있는 장점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연을 기획한 측이나 관람하는 관객 다수에게 불편과 피해를 끼치며 중개 이익만을 챙기는 암표상을 바라보는 눈길은 곱지 않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감지해 현재 국회에는 ‘경범죄 처벌법’과 ‘공연법’ 등에 대해 암표거래와 매크로 프로그램 등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모두 계류상태다. 지난해 온·오프라인 암표 거래 현황을 분석해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한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온·오프라인에서 암표가 횡행한 지 수년째인데 문체부는 법안과 연구용역 핑계를 대면서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우선 암표 거래 현황이라도 미리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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